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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소녀

by 이해린 Mar 16. 2025

해가 누워 반대편으로 그림자가 길게 깔린다. 땅바닥 위로 늘어붙어 찐득찐득해진 검은 선이 주춤거리며 돌아본다. 열어놓은 창문마다 저녁 냄새가 포슬포슬 흘러 나온다. 이제 집에 가야지, 가방을 둘러매고 실내화 가방을 손에 쥐고선 모래사장을 둘러 나온다. 오늘도 못 봤지, 내일은 지나치려나. 요만큼이라도 닮은 것이 지나가려나 주변을 두리번대도 낮열에 뜨끈해진 아스팔트 바닥은 여전히 무겁고 내 얼굴만 괜히 화끈거린다. 여름 내 공 놀이 하느라 얼굴이 까맣게 타고, 짙은 눈썹은 더 까만 6반 재우. 피구도 잘하고, 나보다 수학은 훨씬 잘하는 멋진 재우. 멀리서 눈이 마주치면 꼬박꼬박 눈 인사 해주는 착한 재우.


두부 아저씨가 트럭에서 두부 상자를 정리한다. 상자끼리 부딪혀 덜그럭 거린다. 저래 시끄럽게 부닥치다가 두부끼리 터져버리지 않으려나, 눈을 흘겨 가만히 쳐다보는데 두부는 옅은 갈색의 벽돌처럼 줄지어 조용히 누워있다. 두부 아저씨는 오른 다리가 없다. 두부처럼 으스러졌단다. 그래서 아저씨는 모든게 한짝뿐이다. 한짝 다리, 한짝 신발, 한짝 양말. 아저씨는 왼발에만 파란 장화를 신고, 다른 쪽은  바짓단을 돌돌 올려 종아리께에 둘러맨다. 저녁 여섯시에 아줌마들, 할머니들 삼삼오오 모여 두부 아저씨 둘러싸면 수많은 다리들 사이로 한짝 두부 다리만 멀찍이서도 보인다. 두부 아저씨는 텅 빈 파란 바짓단이 펄럭이도록 바쁘게 돌아다니며 외친다. 한모두모세모두부사세요.


오늘 나는 중임중임무황무황태황무임중임무황태태. 끝도 없이 열심히 불었다. 그랬더니 머리가 띵하고 어지러워져 잠깐 창문 너머를 보면서 쉬었다. 선생님이 단소를 딱딱, 하고선 내 책상을 두들기셨다. 얄궃다. 난 내내 불고 있었는데 그 때는 어디 계셨담. 중임중임무황무황. 단소 음 따라 선생님 눈썹도 점점 올라간다. 분명 아까 전에는 잘만 불렀는데. 선생님이 내 옆을 딱 버티고 서있으니까 숨이 턱턱 막힌다. 옆 짝꿍을 슬쩍 흘겨보니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단소도 없어서 한 시간 내내 손 들고 있는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히죽여.


반납이 늦었다. 연체료 낼 생각에 아득하다. 그 값이면 새로 나온 만화책 신권을 두 권이나 더 빌릴 수 있는데. 엄마 일은 네 시에 끝난다. 학교가 두시 반에 끝나니까 책방에 한 시간 가까이 있을 수 있다. 오늘은 지난 번에 못 끝낸 시리즈를 빌려야지. 만화책방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언니는 머리가 황금색이다. 아래 머리는 번지르르한 황금색인데 이제 정수리에서 막 나오는 머리카락은 새까맣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두고 황금빛과 검정색 진영이 땅따먹기 싸움을 하는 것 같다. 오동통한 다람쥐를 닮은 그 언니는 친절하다. 아무리 친절해도 연체료를 깎아주지는 않겠지만 가끔 만화책방으로 엄마한테 전화가 오면 모른 척 해준다. 어, 여학생이요? 지금 아무도 없어요.


상가를 비잉 한 바퀴 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길. 환풍구 쾌쾌한 냄새 한 숨 들이키고, 튀어나온 보도블럭도 발 끝으로 한번씩 차본다. 어제는 친구들하고 노니라 시간이 쏜살같이 갔는데 오늘은 하루가 길었다. 세상 사람들 다 같이 하루씩 받는데 나한테 오는 하루는 저혼자 길어졌다 싹둑 짧아졌다 그런다. 영 제멋대로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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