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보듯 뻔하다는 말이 있다. 불씨가 추락해 번져나가기 시작하면 그 이후로는 어떤 결말에 치달을지 굳이 기다리지 않아도 능히 예상이 간다는 뜻이 되겠다. 결국에는 모조리 다 타버릴 거다, 몽땅 재가 되어 사라질거다, 저 치솟는 불길을 봐라, 뻔하다. 이런 말이다. 난 그런 적이 있다. 알면서도, 아는데도, 불 보듯 뻔하면서도, 훨훨 날개짓하며 천 갈래 만갈래로 찢어져 나가는 불길 속을 헤쳐나가는 대단히 경이롭고도 딱 그만큼 외로운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 사람은 온통 얼굴이 벌겋고 열이 올라 불의 여파로 저 자신마저 불씨가 된듯해 보였다. 목을 좀 축여야지 되겠다 싶어 물 한 모금 건냈다. 고맙다며 받아드는 손에는 검댕이 묻어 나왔다. 힘들었겠다, 물으니 "사는 게 바빠서 힘든 건 느끼지도 못했다."라고 했다. 아프지 않느냐, 물으니 "아프다기보다는, 글쎄,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하며 얼버무렸다. 내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느냐, 물으니 "어차피 내가 선택한 길이어서 괜찮다. 말이라도 고맙다." 라며 작게 웃어 보였다. 물 한 모금은 내가 가진 전부여서 더 이상 줄 게 없었다. 정말로 내가 가진 전부는 아니었지만 내가 가진 것 중 진정으로 그 사람에게 필요한 건 물 한 모금 밖에 없었다. 그 사람이 다시 내게서 등을 돌리고 불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보며 나는 두 눈을 감았다. 도저히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다.
죽었을까, 죽었겠지. 어떤 숨 붙은 인간이 그런 불을 당해내겠어. 숨이 끊긴지 오래일 것이다. 난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그 날은 아주 화창하고 맑게 갠 날이었다. 너무나도 화창한 나머지 오후 여섯시쯤에 이르자 동네 뒷산의 능선과 산등성이 새로 뉘엿뉘엿 모습을 숨기는 붉은 태양, 햇볕자락이 남기는 길의 터럭까지도 하나하나 볼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하늘은 단감처럼 주홍빛이 되었다가, 부끄러운 아이의 볼처럼 벌갰다가, 사과처럼 새빨갛게, 그러다가 누가 불씨라도 떨어트렸는지 온 세상이 붉어졌다.
어라, 당신은.
오랜만입니다.
아, 그 사람이었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어요. 지난 번 만났을 때 이후로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몸이 많이 상하지는 않으셨을지.
괜찮습니다.
어떻게 괜찮을 수 있겠어요, 불구덩이를 제 발로 들어가신 분께서.
괜찮다마다요, 둘러보세요. 불구덩이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온통 붉었다. 불 들여다보듯, 불 속에 들어간듯, 불이 된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