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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린 Jun 30. 2023

P의 행동발달기록

P는 나이에 비해 체격이 컸지만 마음도 그만큼 컸다. 반마다 한 두 명씩 꼭 나이보다 더 체격이 큰 친구들이 있다. 체중이 더 나간다거나 키가 더 크면 아무래도 모여 있는 틈 바구니에서 눈에 조금 더 잘 보이는 경우도 생기는데 P는 둘 다 였으니 학급 학생들의 이름을 다 외우기 전에 먼저 P에게 시선이 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P는 아주 다정한 아이다. 학부모 상담 주간이 시작되기도 전에 P가 발로 차서 다른 친구의 플라스틱 쓰레받기를 부서트린 적이 있었다. P는 매우 당황했으나 침착하게 사과를 했다. 친구는 사과는 받아 줬지만 마음이 풀리지 않아 뚱한 얼굴이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은 받아드리지 못한 그런 상태였달까. 난 두 친구의 입장과 상황을 각자 들어보았다. 지금 어떤 기분이고 생각을 갖고 있는지, 상대방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상대방과 앞으로 어떻게 지내고 싶은지 등등에 대하여. 아직은 저학년이라 자신이 가진 애매모호한 감정에 이름을 붙이거나 스스로 설명하는 게 벅찰 수 있다. 그래서 쓰레받기의 주인은 '모르겠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P에게 집으로 돌아가 가족에게 이 상황에 대해 설명을 하고,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지 회의를 해오라고 했다. P는 멋쩍게 웃었다. 썩 내키지 않는 모양이다.


"친구가 P의 사과는 당연히 받아 주지만 아직 서운한 모양이야. 섭섭한 마음까지 풀려야 P가 마음 편하게 친구랑 다시 놀 수 있지 않을까?"

"근데 엄마한테 혼날 것 같아요."

"그럼 조금 혼나야지, 뭐 어떡해. 좀 혼나고 얘기 꼭 해봐."


나는 P와 쓰레받기 주인의 학부모 둘 다에게 미리 상황을 얘기를 해두었다. P가 고의적으로 쓰레받기를 부서트린 것은 아니지만, 말 그대로 두 동강이 났기에, 친구의 기분이 충분히 상할 수 있다는 점. P는 진심 어린 사과를 거듭 했다는 점. 친구도 사과를 받아 주었지만 새로운 학기를 맞아 새로 산 물품이 단번에 부서졌다는 것에 대해 내심 서운함을 감추기 어렵다는 점. 이러한 것들을 최대한 오해 없이, 두 아이들의 관계가 틀어지지 않도록, 중립적인 관찰자이면서도 중재자로써 전달하였다.


P의 가족은 P에게 상황을 전해 들었으며, 새로운 쓰레받기를 사주고 싶다 말했다. 나는 쓰레받기 주인인 친구의 학부모에게 연락해 P의 가족이 한 말을 전했다. 친구 학부모는 쓰레받기 주인에게 그냥 넘어가는 게 어떻겠느냐, 라고 달랬으나 완전한 회유에는 실패한 모양이었다. 쓰레받기의 주인은 새로운 쓰레받기를 그 가족이나 선생님도 아닌 P로부터 직접 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 친구의 토라진 모습이 깜찍해서 머쓱해하는 쓰레받기 주인의 학부모와 통화하면서도 웃음이 나올 뻔 했다. 어차피 1000원 남짓한 미니 쓰레받기 세트였다.


"그럼 파란색으로 사는 게 좋을까요?"

"네. 원래 썼던 것도 파란 색이었던 것 같아요."

"준비해서 내일 P한테 전달하라고 할게요."


P는 다시 한 번 사과하며 번쩍거리는 플라스틱 쓰레받기 세트를 친구에게 건냈다.


***

P는 사과에 일가견이 있었다. 물론, 사과를 자주 해야 하는 상황을 만드는 학생도 아니고 꾸며 내는 말은 더더욱이나 아니다. P는 무심코 부딪힌 것에 대해서도 "미안해"라고 꼭 짚고 넘어갔고, 모둠별로 과제를 할 때 본인이 실수를 했다 싶으며 "아, 미안!"이라고 개인이 가져갈 몫 이상으로 책임을 스스로에게 물었다.


P의 사과에는 기분 좋은 선율이 있다. 한 친구가 모르고 P를 밀쳤고, P는 그 친구의 행동이 고의적이라고 판단해 섣부르게 그 친구한테 다가가 자초지종을 묻기도 전에 그 친구의 발을 밟았다. 그랬더니 그 친구의 친구(이 정도면 의리라고도 할 수 있겠다)가 P의 발을 밟았다.


점심 시간에 P와 발을 대신 밟아준 친구(이 친구에겐 그 행동이 잘못 되었을지언정 의리를 보여주려는 행위였으므로 '의리' 라고 칭하겠다)를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의리는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일단, 잘못은 P가 먼저 했으니 무조건 사과는 P가 먼저 해야지, 자기는 하기 싫다는 식이었다. 의리도 결국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긴 했지만 먼저 자신의 친구를 상황을 돌아보기도 전에 '발 밟기'로 응수했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의리는 P를 쳐다 보지 않고, 노려 보았다. P는 배시시 웃었다.


"미안해."

"P, 우리가 사과할 때는 무슨 말과 행동 때문에 미안한 마음을 느끼는지, 앞으로 어떤 행동을 보여줄건지도 자세하게 말해야 진심이 상대방에게 닿는다고 배웠지?"

"미안해, 내가 네 친구 발 밟아서. 앞으로는 안 그럴게. 괜찮아?"


그 말에는 모든 음운마다 높낮이가 실려 있었고 그 때문인지 한 마디 마디가 노래처럼 들렸다. 의리의 입가가 씨익 올라갔다.


"그럼 나도 미안해. 나도 갑자기 화가 나서 네 발 밟았어."


의리는 P의 문장에 실린 멜로디를 돌림 노래처럼 따라 불렀다. 다툼과 토라짐은 날카로운 번개처럼 날아들 수 있어도 그 뒤에 찾아오는 화해와 사과의 시간은 그렇게도 평화로울 수 없다.



***

학부모 상담 주간에 P의 학부모가 말했다, 우리 아이가 집중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 같다고. 올해 학부모 상담 주간은 3월 중순으로 작년보다 한 달이나 앞당겨 잡혀 있었다. 상담 주간 당시 P와 나는 고작 보름만 교실 생활을 함께한 셈이었다. 게다가 다른 아이들도 있으니 P라는 아이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그래서 1학기 학부모 상담 주간은 교사의 시선보다는 학부모의 시선에서 아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는지 묻는데 더 무게를 두고는 한다.


그런데 P의 학부모는 P의 성향과 기질, 생활 습관과 태도 등등을 고려했을 때 집중력이 결핍되어 있을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린 모양이다. P는 산만한 건 확실했다. 책상 주변에 늘 자신의 물건이 꼭 하나 이상은 떨어져 있었고, 하나의 활동에 잔뜩 몰입하면 그 뒤 별개의 활동으로 넘어가는데 걸리는 전환 시간이 길었다. 학습 능력은 매우 좋았으나, 생활 습관은 미숙했다. 그 불균형을 해결해야 한다고 먼저 목소리를 내준건 P의 학부모였다. 난 그 자리에서 학교에서 해줄 수 있는 지원 방안에 대해 하나씩 짚어 주었다. P의 학부모는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잠시 생각하고 결정하겠다고 말해주었다.



***

상담 주간 이후에도, P는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아마 눈도, 이마도, 볼도 동그래서 더 그래 보이는 걸 수도 있다. 단원을 마무리하면서 모둠 게임을 했다. 게임을 하면서 점점 교실 분위기가 고조 되었고, P는 제자리에 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P는 흥분으로 두 뺨이 상기되었고, 원래도 반짝이는 두 눈이 보석을 박은 듯 빛났다.


P의 모둠에게 랜덤 박스를 뽑을 찬스가 돌아 왔다. 비극적이게도 P가 선택한 랜덤 박스에서 모둠 점수를 조금 깎는 게 나오자 P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자신의 머리를 말 그대로 쥐어 뜯었다. 모둠 친구들은 오히려 P에게 달려들어 괜찮다고 위로했지만 P에게는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는 모양인지 격앙된 감정은 지속되었다. 마침 교과 시간이 끝날 시간이 다 되어 P와 내가 이야기 해보겠다고 한 뒤, 인사를 하고 친구들을 하교 시켰다.


빈 교실에 P와 나만 남았다. P는 어느 정도 진정되어 있었다.


"P, 다른 친구가 랜덤 박스를 뽑아서 5점 감점이 나오면 넌 어떤 말을 해줄 거야?"

"괜찮아. 상관 없어."

"선생님도 P가 그런 말을 해줄 거라고 생각해. P는 마음이 넓어서. 그럼 P는 지금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해줄 수 없을까?"

"그건 잘 안 돼요. 그러기는 어려워요."


다른 친구들에게는 한없이 상냥하고 다정한 P는 스스로에게 너무나도 무정했다. 나는 P의 두 눈에 깃든 고통을 목격하고,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울고 싶었다. P 대신 울어 주고 싶었다. 고작 5점에 너무 많은 눈물을 쏟아 버린 P에 대한 미안함에, P의 다정함이 스스로에게는 돌아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이유 모를 탄식 때문에.



***

학부모 공개 수업은 상담 주간 바로 그 다음 주에 이어졌다. 코로나 이후 오랜만에 개방된 학교에 학부모의 발길은 끊임 없이 교문을 넘아 들었다. 우린 창의적 체험 활동 수업을 했다. 주제는 '내 소중함 알기'였다. 스스로의 장점을 찾아내고, 친구들에게 어울리는 장점을 선물한 뒤, 마지막으로 나에게 칭찬 트로피를 주는 활동이었다. 그리고 제작한 칭찬 트로피를 가져 나와 앞에서 전체 발표를 하는 것으로 수업은 화룡점정을 찍는 흐름이었다. 어떤 친구는 아주 개미만한 목소리로 칭찬 트로피를 읽었고, 어떤 친구는 아예 전체 발표의 두려움을 떨치지 못해 엄마가 대신 나와 읽어서 수여해 주었다.


P는 칭찬 트로피를 완성하지 못해 눈물을 흘렸다. 책상에 엎드려 머리를 쾅 박았다. 친구들은 "괜찮아!"와 "울지 마!"를 연호했다. 교실을 가득 메운 학생의 가족들은 걱정과 애정의 시선으로 기다려 주었다. 정말로 괜찮았으니까, 그리고 진짜로 울지 않았으면 좋겠으니까. 난 P에게 다가가 칭찬 트로피를 살짝 뒤집어 보았다. 여러 번 썼다 지운 흔적이 역력했다.


"P, 선생님이 도와 줄까?"


P는 파묻은 고개를 겨우 끄덕였다. 난 P가 지운 흔적을 그대로 따라 썼다. 토씨 하나 바꾸지 않았다. P의 순서는 가장 뒤로 밀렸다. 기다리는 동안 스스로를 더 추스려야 될 것 같았다.


P에게 상을 준 건 나였다.


"올해의 축구선수상, 이 학생은 최고의 골을 선보여 그 노력을 칭찬합니다."


일동 박수.


P의 학부모는 그 날 아이가 괴로워 하는 모습을 보고 빨리 도와주고 싶다, 결심했다고 한다. 교내 상담 기관과 연계해 P는 검사를 받을 것이고, 검사 결과에 따라 P의 가족이 의학적 도움을 받을 지 또는 다른 대안이 있을 지 고려해 볼 것이다. 그러는 동안, P는 교실에서 시간을 보낼 것이다. 즐겁게, 재밌게, 의미 있게.



***

오늘 일이다. 수학 분류하기 수업을 마치며 팔찌 만들기 수업을 했다. 작은 비즈를 낚시줄에 꿰 묶어서 목걸이, 반지, 팔찌 같은 걸 만드는 거였다. P의 손은 야무지지 못하다. 어쩔 수 없다. 대신 P는 공을 잘 차고 잘 던진다. 잘하는 게 있으면 못하는 것도 있어야지.


P는 절망의 늪에 빠졌다. 낚시줄에 겨우 꿴 반지를 세 번이나 엎질렀다. 끝과 끝을 잡아서 나오라고, 그래야 선생님이 묶어줄 수 있다고 오 백 번을 넘게 말했다. P도 그 중 세 번은 잘 들었을 거다. 전북현대 서포터즈로써 색깔과 모양 비즈도 특별히 골라서 진심을 다해 만드니 평소보다 더 독하게 집중한 건 분명했다. 특히, 한 번 엎지르고 난 다음에는 제 딴에는 더 주의를 기울였을 거다. 하지만 P에게는 운이 따르는 날이 아니었다.


P는 "안 할래요! 안 할 거예요!"라고 했고, 나는 태연하게 "축구 선수가 힘들다고 그라운드 뛰쳐 나가는 거 봤나요? 축구 선수는 심장과 폐가 터질 것 같아도 90분을 다 뛰려고 합니다."라고 응수했다. P는 아슬아슬하게 벼랑 끝에 서 있었다. 달래주러 가고 싶었다. P에게 해결사가 되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겐 다른 스무 몇 명의 묶어주어야 할 것들이 이미 산더미였고, 붙잡다 놓친 작은 비즈들이 온갖 곳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살벌한 현장이었다. 타오르고 있는 P의 울화통을 식혀야 하는 건 다름 아닌 P 자신이었다.


P는 결국 완성한 반지 하나마저 끊어지는 설상가상의 비극을 겪어야만 했지만 울화통도 분통도 터트리지 않았다. 하지만 울컥 치밀어 오르는 걸 참아 내려는 혼신의 노력을 난 보았다. 불씨가 번지기 전에 얼른 물을 끼얹어 주기 위해 밥을 먹고, 운동장에서 나가 놀았다. 국어 시간에는 포켓몬 게임을 하고, 여름 시간에는 곤충 퀴즈를 했다. 마지막으로 코딩 수업을 하면서 현란하게 하루를 마무리 했다. P에게는 집에서 만들 수 있도록 컵 안에 끈과 비즈를 담아 주었다.


그 날은 공교롭게도 금요일이었고, 난 가족의 생일이 있어 수업을 마친 뒤 평소보다 일찍 조퇴해 기차를 타고 본가로 내려왔다. 해가 길어진 여름, 난 P를 생각하며 구슬 하나 하나를 끈에 꿰었다. 노란 색, 초록 색을 번갈아 가며 밀어 넣었다. 나도 만들면서 한 번 주르륵 다 미끌어 졌다. 그래도 다시 시작했다. P가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만 내내 했다. 다음 주 월요일에 얼른 P를 만나 주고 싶다. P의 웃는 얼굴을 더 많이, 자주 보고 싶다. 사랑과 기쁨으로만 가득찬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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