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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비 Jul 18. 2022

# 3. 천국에서 일합니다.

쿰쿰한 책 냄새와 커피 향이 어우러진 공간, 북까페.

카페 이름은 '사이' 

영주가 일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일하게 된 첫날, 카페 이름이 왜 '사이'인지 사장님께 물었다.

"모든 두 대상의 사이에 이 공간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었어요. '사이'는 '틈'이거든요. 틈은 여유예요. 무엇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요. 이 공간이 여길 찾는 사람들에게 그런 작용을 하면 좋겠어요."

사장님은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철학이 영주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영주는 테이블에 앉은 손님들의 표정에서 종종 그 틈을 발견했다. 손님들은 이 공간에서 여러 가지 표정을 짓고 앉아 있다. 미소, 무표정, 우울함, 설렘 같은 다양한 감정들...... '사이'가 손님들에게 주는 일종의 서비스다.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의 공간이 넓은 이유도 편안하고 안락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다. 종종 빈자리가 없어 돌아서는 손님들을 보고 사람들이 말한다.

"테이블 몇 개 더 들여놓으면 될 것 같은데요?"

하지만, 사장은 그런 조언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영주는 사장의 철학인 '틈'을 고수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영주 씨, 좀 한가할 때는 하고 싶은 거 해도 돼요. 책을 읽어도 좋고."

손님이 뜸해지자, 할 일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영주에게 사장이 말했다.

월급 받고 일하는데, 장사가 안 되는 날은 눈치가 보였다. 사장은 매출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영주는 괜히 심난했다. 손님들이 북적거리는 날은 피곤했지만, 돈값을 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나를 고용한 값어치'를 톡톡히 하고 싶었다. 영주는 이왕이면  '가성비가 좋은 사람'이 되기로 했다.

카페 구석구석을 닦고 또 닦았다.

"아휴, 영주 씨도 참. 적당히 해요. 적당히. "

사장이 영주의 팔을 흔들며 말했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영주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 공간은 손님들한테만 '틈'이 아니에요. 나한테도 영주 씨한테도 해당되는 말이에요. 일하는 시간 사이사이에 휴식도 취하고 그러면서 틈을 만들어주는 거예요."

사장의 일상적이지 않은 대화체가 영주를 정지시켰다. 돈 주고 고용한 직원에게 이런 말을 하는 사장이 낯설었다. 하지만, 어떤 책에서 좋은 문장을 발견한 것처럼 묘하고 설렜다. 영주는 의자에 앉아 '사이'에서 발견한 문장을 곱씹었다.

 '틈' '틈' '틈' 틈이라는 단어가 입안에서 맴돌았다.


"요 앞 한의원에 가서 물리치료 좀 받고 올게. 책 구경도 하고 그래."

사장이 책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벽면에 붙박이로 자리 잡은 커다란 책장에는 소설이나 에세이가 가득했다. 더러 시집이나 자기 계발서도 있었다. 에세이 한 권이 소설 장르 쪽에 잘못 꽂혀 있었다. 아마 손님들이 책을 본 후 아무렇게나 꽂아둔 모양이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에세이집이 눈에 들어왔다.

도서관에서 읽은 후 소장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구입한 책이다. 책 표지부터 익숙했다.

책을 제 자리에 꽃아 두기 위해 집어 든 순간 책 속에서 카드 한 장이 떨어졌다.

'현재의 힘들고 고단한 삶에 작은 위로가 필요하신 분들에게 추천해요.  20살이 되면 물리적으론 어른이죠. 하지만, 힘듦을 이겨내고 더 단단해지면서 서서히 어른이 되어간다고 생각해요. 우리 함께 천천히 어른이 되기로 해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라는 멘트가 손글씨로 쓰여 있었다. 다른 책들도 마찬가지로 짧은 리뷰들이 적힌 카드가 꽂혀 있었다.  독립서점처럼 책의 수요를 늘리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카페 한편에 놓인 책에서 이런 카드를 발견하다니. 신기했다.

책 리뷰 카드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영주는 편의점 일을 그만두고 이곳에서 일하게 된 것도 어쩌면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로 아직 리뷰 카드가 없는 책들과 새로 들여온 책들의 리뷰 카드를 작성했다.

"리뷰 카드 제가 써도 될까요?"

영주가 처음 이 말을 내뱉을 때 눈이 반짝거렸다.

"리뷰 카드 쓰는 즐거움이 쏠쏠해. 영주 씨라면 내가 기꺼이 양보하지."

사장은 신의 소소한 즐거움을 영주에게 건넸다.

"오~  영주 씨 글 잘 쓰네. 작가 해도 되겠어."

사장이 영주가 쓴 리뷰를 읽으며 말했다. 영주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었다.

"하긴 뭐 이미 작가 아닌가? 짧지만, 내가 쓴 글이 누군가에게 읽히니까 말이야. 다 처음엔 그렇게 시작하는 거지."

사장은 농담을 했다. 하지만, 영주의 귀에선 그냥 걸러지지 않았다.

보통사람들보다 조금 나은 필력으로 인터넷 플랫폼에 소설을 연재하고, '좋아요' 같은 공감을 받고 댓글도 받는다. 수익과 직결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영주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이야기하고, 세상과 연결된다.

'프로를 꿈꾸지만, 프로가 아니어도 괜찮아.'

영주는 또 이 말을 되뇌었다. 글쓰기로 경제적 자유를 얻고 유명세를 타고 싶다는 욕망이 불끈불끈 치솟을 때마다 자신을 다스리기 위한 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갈증을 느끼고 지칠테니까. 오래 걷지 못하고 멈출테니까.


 지금 이곳에서 수많은 책들을 만나고 리뷰 카드를 작성하고 틈나는 시간엔 글을 쓴다. 

 돈도 벌고,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이곳이 천국처럼 느껴진다. 가슴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욕망을 다스릴 수 있다면 이곳보다 더 나은 천국은 없다.

영주는 갑자기 이곳이 환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허공에 붕 뜨는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천국에서 일합니다.'

무슨 일을 하냐고 누군가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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