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가 '사이' 북까페에서 일한 지도 어느새 3개월이 되었다. 일상에서 '사이'는 점점 자전거의 바퀴 하나가 되어갔다. 영주와 '사이'가 함께 회전하면서 하루의 끝을 향해 굴러간다.
영주는 이곳에서 일하면서 생각했다. 편의점에서도 그랬듯이 어딜 가나 돌아이는 있다고.
영주가 편의점 일을 하면서 처음 마주한 돌아이는 그나마 양반이었다. 편의점에서 가격 흥정을 하던 아저씨. 그 상황에선 아주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점점 시일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그 정도쯤은 어느 일터에서나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별게 아닌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리필!"
영주가 한가한 틈을 타 책을 읽고 있던 찰나,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다짜고짜 말했다.
커피잔을 들이밀며 말하는 어투가 상당히 당당했다.
"죄송하지만, 리필은 안됩니다."
영주가 애써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깟 원두 얼마나 한다고. 한잔 정도는 해줄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여자가 영주를 향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손님, 죄송합니다."
영주는 짧게 대답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의 긴 대화는 에너지를 소모시킬 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영주는 이렇게 일반적이지 않은 손님들을 볼 때 불쾌하지만, 한편으론 기쁘다.
'네 태도를 네 모습을 기록해주겠어.'
영주는 혼자 하는 기록들이 비록 누군가에게 읽히지 않는다고 해도 버려지지 않고 남겨진다고 생각하면 통쾌했다. 돌아이들은 어쩌면 그런 행동들이 쉽게 소모되고 잊히기 때문에 가볍게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영주는 매일매일 '사이'에서 만나는 짧은 인연들에 대해 기록한다.
이렇게 영주의 일터는 경제적인 문제 외에도 글감을 발견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 되었다.
커피 리필 퇴짜를 맞은 손님이 퉁퉁거리며 되돌아갔다. 영주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자신이 처음 글쓰기를 시작했던 그때를.
영주는 중학교 2학년 때 전학을 갔다. 그 학교에서 반 아이들이 '은따'를 시키던 지수.
반 아이들은 지수를 '은근히 왕따'시키는 일을 즐거워했다. 선생님들 앞에서는 일부러 친하게 보이려고 노력했고, 지수를 둘러싸고 앉아서 자기들끼리 대화를 했다. 또 단톡방에서 익명의 친구 하나를 두고 욕을 했다. 분명히 지수 욕이었는데, 지수까지 초대했다.
'걔는 눈치도 더럽게 없더라. 다 자기를 좋아하는 줄 착각하나?'
'그러게. 걔네 집 생선 장사해서 그런가? 비린내도 엄청 나.'
영주는 참을 수 없이 유치하고 화가 났다. 그 내용을 쓴 친구 한 명을 찾아갔다.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도대체 지수한테 왜 그래?"
울그락불그락 화난 얼굴로 따졌다.
"야! 네가 전학 와서 뭘 모르나 본데, 지수 편들었다가 너도 글꼴 나. 아니면 네가 지수 역할 대신하던가."
그 얘는 침착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불끈 쥔 주먹으로 얼굴이라도 갈겨주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었다.
"뭐 더 할 말 있어?"
입술을 실룩거리며 그 얘가 말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영주는 갑자기 기운이 빠졌다. 자신이 무력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에. 그 날밤 담임 선생님에게 편지를 썼다.
반 아이들이 지수에게 한 행동들을 고발하기로 했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영주는 여러 번 수정하면서 최대한 상황의 심각성을 드러냈다.
다음 날 종례 시간이었다.
"난 우리 반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는 걸 원하지 않아. 만약 말로만 듣던 '왕따' 그런 일이 우리 반에서 벌어진다면 절대 두고 보지 않을 거야. 내가 그동안 너무 소홀했지? 앞으로는 관심 있게 지켜보려고."
담임선생님이 단호하고 엄중하게 말했다.
반 아이들이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서로를 바라봤다. 지수와 영주만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후로 반 아이들은 지수를 유령 취급했다. 누구 하나 괴롭히는 사람도 없었고, 말을 걸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수는 여전히 고통스러웠다.
철저히 섬에 갇힌 기분이었으니까. 섬 밖에는 많은 사람들과 배들이 오가지만, 누구 하나 섬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나 좀 봐달라고 손을 흔들어보지만,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섬이다.
간혹 영주가 다가와 말을 건넸지만, 그럴수록 반 아이들은 영주까지 멀리했다. 영주는 신경 쓰지 않는 척 연기했다. 하지만, 지수는 그런 영주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나 전학 가."
지수가 영주에게 다가와 말했다.
"갑자기? 왜?"
영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갑자기는 아니고 예전부터 생각했었어."
지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학서류를 작성하면서 영주가 편지를 쓴 사실을 듣게 되었다고 했다.
"도움도 안 됐는데 뭘."
영주는 마치 자신이 헛수고한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고 생각했다.
"아니야. 뭐라도 했잖아. 나를 위해서.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다음에도 누구에게든 이런 상황이 오면 꼭 그렇게 해줘."
"고마웠어."
지수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기록.
그것이 고발이든 하소연이든 애원이든 상관없다.
한 사람만을 위한 수고라도 괜찮다. 영주는 자신이 치르고 있는 상황에서 목격하고 경험한 일들을 기록한다. 그 상황이 최악일지라도 고스란히 보관하기 위해 기록한다.
기록은 현재의 순간을 소모되지 않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기록만이 순간을 섬세하게 기억하고 보관한다. 그래서 언제 어느 때 꺼내 보아도 그 순간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영주는 제2의 지수도 쓰고, 일터에서 만난 빌런도 쓰고, 가끔 공상의 세계도 쓴다.
영주가 글쓰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분노였고, 고발이었다.
그 결과들이 아주 미미할지라도 영주는 계속 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