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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비 Jul 19. 2022

# 4. 언저리에라도 머물러야 합니다.

저녁 7시가 되자, 현이가 들어왔다. 현이는 대학을 다니며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는 현이. 

그러다가 손님이 뜸한 시간이 되자, 책을 꺼내 들고 시험공부를 한다.

"무슨 과야?" 

영주는 커피 라테 한 잔을 현이에게 건네며 물었다.

"미디어영상학과요."

현이가 커피잔을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아 그래?"

영주는 더 이상 공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짧게 말했다.

"영화감독이 꿈이에요. 봉준호 감독 같은 영화감독이요. 현실적인 메시지를 강렬하게 던져줬어요. '마더' '기생충' 같은 작품들이요."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보고 나면 마음에 덩어리가 남아요. 그래서 자꾸 무거워져요."

현이가 자신의 꿈 이야기를 마구 풀어놓았다.


"봉준호 영화감독?"

영주가 살짝 놀란 듯 물었다.

"네. 물론 봉준호 감독처럼 되는 건 많이 어렵다는 거 알아요. '너 같은 게 무슨 영화감독이야?' 고등학교 때는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어요. 자꾸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까 꿈이 사라졌어요."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되고. 매일 핑계를 만들어서 꿈을 죽였어요."

"고 3 때 학교에서 강연을 들었어요. '진심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그 언저리에라도 머물러야 합니다. '라는 강사님의 말이 지금까지도 선명해요."

언저리...... 영주는 '언저리'라는 단어에 가슴이 뭉클했다. 3년 동안 줄곧 그 언저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 언저리에서 영주는 쪼그라들었다가 다시 펴지기를 반복했다. 타인의 시선과 말에 수축되다가도 애써 팽창했다. 억지로라도 마음을 풍선처럼 빵빵하게 부풀렸다.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러다 누군가 날카로운 바늘로 콕 찌르면 어김없이 터져버렸다.

그렇다고 터져버린 채 널브러져 있지 않았다. 여기저기 상처를 치유하고 다시 부풀어 올랐다. 

상처를 치유한 흔적이 난자하지만, 어김없이 또 바람을 불어넣는다.

그것이 영주가 언저리에서 살아가는 방식이다. 상처를 받고 치유하고 극복해나가는 모든 과정이 영주의 이력이다. 영주가 쓰는 글에는 그 이력의 흔적들이 베여있다. 

'언저리' 영주는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그 단어가 참 애달프게 들렸다.


"그래서 지금 언저리에 머무는 중이에요. "

현이는 대학 2학년에 재학 중이다. 매 학기마다 장학금을 놓치지 않는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절실한 이유도 있지만, 확고한 미래를 설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저리를 그냥 빙빙 배회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언저리에 머물더라도 느슨해지지 않기로 했다.

"아 그렇구나. 그럼 나도 언저리에 머무는 중이네."

영주가 현이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언니는 꿈이 뭐예요?"

현이가 재촉하듯 물었다.

"음...... 작가. 돈 걱정 안 하고 쓸 수 있는 그런 작가."

영주가 한 템포 쉬면서 대답했다.

자신의 삶에서 쓰는 순간을 더 늘리고 싶었다. 좋아하는 일이 업이 되면 번뇌가 된다고 했다. 그 말을 영주에게 해준 사람은 이미 여러 권의 책을 출판한 전업 작가였다.

번뇌. 이미 사는 자체가 번뇌고 언저리에 머물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번뇌다. 영주는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을 수 있다면 지금보다 더 큰 번뇌도 얼마든지 감당해주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아, 그래서 책도 많이 읽고 매일 뭔가를 썼던 거네요."

"우리 둘 다 꼭 꿈을 이뤘으면 좋겠어요. 언니는 극본, 나는 연출. 같이 작품도 만들고요."

현이는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다.

"네 말대로 언저리를 떠나지 않고, 머물다 보면 언젠가는 되겠지. 돼야지."

영주가 현이의 농담에 맞장구를 쳤다.


그때였다. 카페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카페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영주 앞으로 다가온다.

"저, 혹시 여기 아르바이트생 안구하나요?"

왜소한 체격에 숫기가 없어 보이는 남자는 대학생으로 보였다. 

"안 구하는데요."

현이가 짧게 대답했다. 남자는 바로 발길을 돌리지 않고 머뭇거렸다.

"그럼 나중에라도 구하면 연락 좀 주실 수 있나요? 저 바리스타 자격증도 있어요."

남자가 가방에서 이력서가 담긴 하얀 봉투를 꺼냈다. 

마침 카페 안으로 들어오는 사장과 남자가 마주쳤다. 

"저분이 사람 구하냐고 이력서를 주셨어요."

영주가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사장과 남자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바리스타 자격증도 있네요?"

사장이 이력서를 훑어보며 물었다.

"네. 카페 창업을 하고 싶어서요. 지금 아니고, 몇 년 뒤예요. 미리 차근차근 준비하는 거예요."

숫기 없던 남자의 표정이 밝아졌다.

"지금 저 사람도 언저리를 찾나 봐요."

현이가 영주에게 귓속말을 했다.

"사장님! 저 방학되면 집에 내려가요."

현이가 뜬금없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아 그래?"

"한 달 뒤면 방학이니까 그때라도 괜찮으면 연락 줄게요."

"우리 집 커피맛 괜찮아요. 가면서 마셔요."

사장이 아메리카노 한 잔을 남자의 손에 들려줬다.

"고맙습니다. 그럼 연락 기다릴게요."

남자가 고개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방학 때 진짜 집에 가려고?"

영주가 현이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사실, 갈까 말까 고민 중이었어요. 저 사람이 내린 커피가 더 맛있을 거 같지 않아요?"

현이의 말속에서 영주는 느낄 수 있었다.

남자의 꿈, 그 언저리를 위해 살짝 양보한 것임을.

'꿈이 있다면 그 언저리에라도 머물러야 합니다.'

현이의 말이 영주의 뇌리 속에 무겁게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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