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어떻게 언어가 되는가
한국어와 영어를 모두 구사할 때는 ‘기도를 할 때 자기가 편한 언어가 자기 영혼의 언어’라고 한다. 한국어가 더 편한 유학생, 이민자들은 꼭 한국말로 찬양부르고 기도하고 설교들을 곳을 찾는다. 그렇지만 나는 전공이 그리스도교 의례이다보니 자연히 미국 교회를 다녀보게 되었다. 나는 언어가 익숙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새 영혼의 언어’를 배우게 되었다.
내가 나간 교회는 성공회 교회인데, 한국성공회는 규모가 작지만 미국에서는 꽤 크다. 성공회는 영국의 종교개혁으로 가톨릭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교단이다. 개신교 교리에 가톨릭의 예배의례를 보전했다. 미국은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기에 당연히 주류 교회가 성공회였고, 미국 초기 대통령 십여명이 모두 성공회 신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독립전쟁을 치르면서 성공회는 ‘잉글랜드 국교회’에서 갈라져나와 ‘주교제 교회’라는 뜻인 에피스코팔 처치(Episcopal Church)라는 새 이름을 단다. 수도 워싱턴DC에 가면 포토맥 강변, 숲이 우거진 언덕 위에 우뚝 솟은 고딕 대성당이 보이는데 그것이 워싱턴 국립 대성당(Washington National Cathedral)이다. 성공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성공회 대성당이기도 하다. 여기는 역대 대통령들의 장례식 장소 혹은 국가적 위기시의 기도 혹은 추모장소로 사용된다. 미국의 국가신전이라고 할 만하다. 최근에는 스테인드글라스에 새겨진 남부기와 남부 장군들을 인종차별 반대 민권운동의 역사를 반영하는 ‘스톤월’항쟁 등의 사건으로 바꾸기도 했다. 2016년에는 올랜도의 게이 나이트클럽 펄스에서 벌어진 총기난사로 죽은 49명을 추모하며 중후한 저음으로 49번의 추모 타종(Mourning Bell Tolling)을 울리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감리교, 장로교와 함께 진보적인 ’역사적 주류 교단’(Mainline Churches)에 속한 교단이다. 주로 진보적인 백인 상류층들이 많이 다니는 교회다. 특히 2003년에는 세계그리스도교사에서 최초로 게이를 주교(bishop)로 선출했고, 2006년에는 백인 여성인 캐서린 쇼리를 미국성공회 전체의 의장주교(Presiding Bishop)로 선출했으며, 2015년에는 흑인 남성인 마이클 커리가 그 자리를 이었다. 모두 ‘최초’라는 수식어를 단 일들이었다. 그만큼 진보적인 교단이다.
우리는 시카고 근교도시인 에반스톤에 있는 성 마크 성공회교회(St. Mark’s Episcopal Church)에 다녔다. 조용한 주택가에 위치한 작고 아담한 교회다. 주임신부는 레즈비언으로, 자신의 파트너와 함께 성당 마당 옆 사제관에서 살았다. 백인 부부인 그들은 흑인 아이 둘을 임시보호도 하고 있었다.
시카고는 여름이 참 아름답다. 미시간 호수는 평소에는 어두운 빛을 하고 있지만, 여름이 되면 뜨거운 햇볕에 새파랗게 쨍한 빛을 낸다. 호수변을 따라 짙은 초록색이 된 커다란 나무들이 늘어선 공원이 있고, 말하자면 ‘강변서로’쯤 되는 레이크쇼어 드라이브Lakeshore Drive를 따라 달리기를 할 수 있는 길이 호숫가에 있다. 호숫가 비치도 일제히 오픈해서, 여름이면 비치타올을 걸치고 젖은 머리로 비치와 공원을 오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낮에는 햇볕이 쨍하지만 밤에 열대야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늘에만 있으면 시원한 바람이 불곤했다. 그래서 우리 동네의 고색창연한 아파트들에는 에어컨이 없는 곳이 많았다. 여름 딱 두 달, 낮에만 틀 것이라 그런가 보다. 역시 오래된 우리 성당에도 에어컨이 없었다.
그래서 여름이 되면 신부님은 성당을 벗어나 호숫가 공원에서 ‘여름 예배’를 보았다. 교인이 약 스물 댓 명쯤 올까, 그렇게 큰 모임은 아니었다. 모두들 돗자리나 캠핑의자를 가지고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앞자리에는 우리의 주된 그늘이 되어주는 나무 앞에 사제석이 있었고, 가운데에는 간이테이블 위에 하얀 제대보를 씌운 제대가 있었다. 그 위에는 금색으로 빛나는 성작이라는 예식용 큰 컵이 놓여있었다. 여름 바람에 하얀 제대보와 신부님이 입은 하얀 장백의, 아이보리 빛의 다마스크 천으로 만든 영대(목도리처럼 생긴 긴 천)가 흩날렸다. 찬양인도자의 선창으로 같이 노래부르고 전쟁으로 죽어가는 어린이와 여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10분 여의 짧은 강론을 듣고 있었다. 가끔 운동하며 산책하며 지나가던 사람들이 잠시 귀를 기울이다 가곤 했다. 어떤 사람은 그게 사제석인지 모르고, 거기에 편히 앉아 유심히 강론을 듣다 일어나 가기도 했다. 누구도 그걸 가지고 뭐라하거나 당황해 하지 않았다. 거대한 나무에 바람이 불면 커다란 이파리들이 쏴아아아 소릴 내는 것처럼 모든 것이 당연스럽게 열려 있었다.
그 여름에는 역사적인 개기일식도 있었다. 신부님은 주보에 광고를 냈다. ‘역사적인 개기일식! 함께 봐요! 함께할 사람들은 모일 모시에 성당 잔디마당서 만나요!’ 그 날이 되어 점심 먹고 여유롭게 길을 나섰다. 도착해 보니 잔디밭에는 형형색색 캠핑의자들이 한개 혹은 두개씩 늘어서 있었다. 신부님은 신자들에게 자외선 차단 종이 안경을 나눠주며 돌아다녔다. 다들 레모네이드 한잔씩 들고 캠핑의자에 반쯤 누운 각도로 고개를 하늘로 쳐들고 있었다. 신부님은 유명한 환경론자이자 시인인 웬델 베리Wendell Berry의 시를 읽어주었다. 그리고 ‘플라이 미 투 더 문Fly Me to the Moon’ 노래가 흘러나왔다. 노랫가락을 흥얼흥얼하는 사이, 주변이 적막하고 어두워졌다. 신부님이 좋아한다는 달에 관한 노래 몇 곡이 더 이어졌다. 짧은 모임이었지만 우리는 신부님의 영혼의 언어를 좋아하게 되었다.
우리 성당 반주자는 ‘그리스도교 음악’을 전공한 찬양사역자라기보다는, 피아노를 전공한, 다양한 악기에도 재능 있는 음악가에 가까웠다. 20대 젊은 친구였는데, 예배 전후로 오카리나를 불기도 하고, 핸드벨 콰이어를 만들기도 하고, 종려주일(예수가 수난받기 위해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한 날)에는 백파이프를 불기도 했다. 하루는 성당에 조금 늦게 도착했는데 성당 입구에서 키 큰 그가 검은색 캐석(cassock, 발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옷)에 흰 중백의를 입고 서서, 천장에서 내려온 여러개의 줄을 당기며 찬송가를 종으로 연주하는 것도 보았다. 그러던 어느 예배 마친 오후에 후주곡은 내가 좋아하는 바흐의 곡이었다. 그는 잔잔하면서도 당당한 음색으로 피아노를 치고 있었고 나는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온 색색깔의 빛 속에 음들이 하나하나 마룻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정성스럽게 예배 중에 쓸 곡들을 엄선해서 새롭게 연주해 보이곤 했다. 우리는 그의 영혼의 언어도 사랑했다.
외국인인 우리가 그들의 영혼의 언어를 배울 수 있던 것은, 모든 것이 알아채기 쉽게 예배서에 쓰인 아름다운 영어 글귀대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강론이 현지 문화적인 내용이 많아 조금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일단 ‘인간적으로’ 짧았고(약 10분), 내용도 인류애적이었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영혼의 언어를 배웠다.그것은 단지 영어가 아니라, ‘아름다움의 언어’였다.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이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예식문을 통해 공동체 안에서 환대를 경험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앞뒤로 앉은 게이부부와 그 아이들과 ‘평화의 인사’를 나눴고, 정신지체가 있든, 피부색이 다르든, 잠시나마 편견없는 세상을 먼저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보수적인 한인교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시카고를 떠날 때가 되었을 때, 나는 시험에 들어 성당도 안 나가고 방황하고 있었지만, 우리 아들에게는 미국성공회의 전례를 따른 유아세례를 받도록 했다. 나는 비록 지금 이러하지만 공동체가, 대부모들(godparents)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좋은 것을 배울 수 있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세 가족은 한국에서 가져온 한복을 잘 차려입었다. 내 절친한 친구 둘에게 대부모역을 부탁했다. 그들은 각각 서울, 애틀랜타에들 있어서 동영상을 통해 아이를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잘 키우겠다고 서약했다. 사제는 아이의 이마에 성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물을 붓고, 부활초에서 초를 켜서 아이에게 주었다. ‘그리스도의 빛을 받으십시오.’
보통은 유아세례를 받은 이들은 사춘기 나이가 되어서야, 이성이 성숙했다고보고 교리교육을 거치는 견진성사(Confirmation, 견신례 혹은 입교례)를 받고나서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성찬례에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내가 공부한 최신 세례신학에 따라 아이가 세례받은 후 바로 성찬에 참여케 해달라고 신부님에게 설명을 하여 허락을 받았다. 내가 그렇게 한 것은, 한 사람의 신념, 신앙이란, 칠판에 가르쳐서 될 일이 아니고 공동체의 삶을 배우고 따라하며 사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눈물어린 마음으로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가 전공한 것을 실천에 적용했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내 아들을 새가족으로 환영했다. 멋 모르는 표정의 아기가 세례초를 들고, 우리 레즈비언 신부님과 한복입은 우리가 활짝 웃는 모습은, 교회 홈페이지 대문으로 남았다.
사진-성 마크 성공회 교회 성단Sanctua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