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부터 시작된 '아빠 산후우울증'
나는 아내의 임신 전부터 ‘심각한 우울 장애major depression disorder’를 겪고 있었다. 그리고 박사과정 종합시험 탈락과 함께 우리 아기가 태어났다. 아내가 애틀랜타에 취업하면서 나는 쉼없이 곧바로 타주이사와 육아에 뛰어들어야 했다. 내가 왜, 어떻게 시험에 탈락하게 되었는지, 그때는 실망과 분노에 가려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한 때였다. 그런데 들이닥친 육아라는 새로운 과제라니. 수능망친 고3에게 그 다음날로 강화도 기숙학원 들어가 살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육아는 수능과 달리 내가 아닌 한 생명을 붙들어 살려야만 하는 과제였다. 앉아서 엉덩이 싸움을 하는 게 아니라 서서 진땀을 흘리며 낑낑대는 일이었고 언제나 아프면 어쩌나, 죽으면 어쩌나 불안장애가 있는 내게는 과도한 상상 걱정에 시달려야만 하는 일이었다.
내가 코로나로 우울증이 심해질 때 나타난 증상 중 하나가 ‘공포영화 보기’(더 정확히는 유투브 리뷰영상 보기)였다. 생전, 공포영화는 포스터만 봐도 구역질이 나고 똑바로 쳐다도 못 봤었다. 그런 영화 리뷰 중에 보면, 가히 한 장르라고까지 생각될만한 주제가 있는데 그게 바로 ‘산후 우울증’이다. 엄마들이 고립된 일상 속에서 아이를 돌보면서 갑자기 아기 귀신을 보거나 악마가 아기에게 점점 다가오는 등, ‘아기’라는 존재에 대한 부담 자체가 하나의 공포로 형상화한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부분에 공감이 되곤 했다.
박사과정 실패로 이 여파가 3년상은 족히 치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느날 정신차리고 보니 아내는 출근해버리고 나는 모든 게 적막한 가운데 아기에게 아침 이유식을 떠먹이고 있었다. 바흐의 오르간 음악이 오스스하게 울려퍼지는 집안에서.
그 전에 시카고에서 애틀랜타로 내려오면서 ‘타주 이사’까지 했다는 것도 기억해 두어야 한다. (미국 사람 인생 최악의 스트레스가 배우자 죽음과 타주이사라고 한다) 그게 미국에서의 5번째, 돈 아끼려 몸으로 때운 이사였다.
타주이사로 몸과 마음이 완벽하게 피폐할 때, 인생 최악의 순간이 내게로 왔다. 그것도 이젠 운전면허도 없이. 아내가 비자 관련 서류작업을 하면서 깜빡 잊고 조금 늦게 낸 운전면허 관련 서류가 결국 시한을 넘겨 우리는 한 달 가량 면허 없이, 즉 차 없이 살게 되었다. 내가 느끼기에는 석달 같은 시간이었다. 물 한 병도 차 타고 나가 사와야 하는 미국에서 차 없이 어떻게 육아를 한단 말인가.
내가 가장 힘들게 느꼈던 시간은, 아내가 나간 후 아침을 먹고 나서 매일 아파트 앞 숲으로 유아차를 끌고 산책을 나가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아기를 보며 반갑게 인사해줬지만, 내 얼굴은 곧 울 것만 같은, ‘제발 날 좀 구해주세요’하는 얼굴이었다.
엄마가 출근하고 나면, 나는 아침을 해먹이고, 산책을 하고, 낮잠을 재우고,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점심을 먹였다. 그리고 또다시 낮잠, 깬 후에는 엄마오기 전까지 아기에게 티비를 틀어줬다. 그러고 나는 소파에 드러누워버렸다.
‘넌 최악의 아빠야. 네가 다른 아빠들처럼 나가 돈을 벌어오기를 하냐, 아니면 살림남처럼 싹싹하게 반찬해먹이기를 하냐, 넌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 넌 세상 무익한 존재야,’라는 소리가 하루 종일 마음 속에서 울려퍼졌다. 나는 그때 누가 뭐하냐고 물어보면 ‘집에서 애봐요’라고 답하고, (눈으로만 봐요)라고 속으로 답했다. 그냥 ‘애가 죽는 거보다는 낫다’싶게 ‘다치지만 않게 하자’는 마음으로 애를 눈으로만 봤다. 아무런 의욕도 생기도 없었다.
양가가 있어 잠시라도 애를 맡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육아맘들과 친구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코로나라 트럼프가 선동한 아시아인 인종차별 때문에 밖에 나가기도 무서웠고, 그냥 일반적인 친구조차 연락할 데가 없었다. 애틀랜타 여름 땡볕 아래, ‘나는 완벽하게 혼자’였다.
‘아이가 혹여 죽을까’ 두려워했던 것 외에 가장 큰 공포는, ‘나는 이제 평생 육아, 살림만 해야 하는 건가’라는, 나라는 사람 자체가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었다. 나는 심지어 아이에 대한 원망까지도 있었다. ‘너 때문에 내 꿈이 박살났잖아.’ 원체 아이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던 나인데, 이렇게 되니 나는 말 그대로 할 수 없이 하는, 수동적인 육아만 하고 있었다. 그 시간을 지켜보아야만 했던 아이 엄마에게는 얼마나 또 외롭고 힘든 시간이었을까.
이것은 ‘아빠 산후 우울증Paternal Perinatal Depression'이었다.
아니, 아빠가 애 낳는 데 뭘했다고 ‘산후 우울증Postpartum Depression’을 겪어? 그건 엄마나 겪는 거지!
그것도 이젠 잘못된 편견이 되어가고 있다. 왜냐하면 세계적으로 여성의 사회참여활동이 증가하면서 남성들이 육아의 의무를 맡게 되는 일이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들이 산후 호르몬 변화로 감정기복을 겪고 힘들어 하는 것처럼, 아빠들도 테스토스테론의 감소를 겪으며, 특히 육아빠들은 에스트로겐의 증가도 경험하게 된다.
최근래 행해진 여러 연구에 따르면, 아빠 산후 우울증은 아이가 있는 남성 인구의 8~25%까지도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70% 넘는 남성들은 사회규범의 영향으로 ‘정신이 아픈 것=나약한 것’이라고 오해해서 치료시기를 놓치거나 아예 증상을 무시하고 그저 견딘다고 한다. 이 우울증은 1) 이미 우울증 경력이 있거나, 2) 배우자가 산후우울증을 경험하고 있을 때 경험할 확률이 두 배 이상으로 높다. 두번째, 세번째 아이라고 해도 또다시 반복될 수 있다.
주요한 증상은 우울증의 증상과 비슷하다. 다만 남자의 경우, 증상이 신체적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걷잡을 수 없이 폭력적으로, 부당한 화를 낸다든가, 짜증을 낸다든가, 에너지 고갈 상태를 느끼거나, 과한 혹은 부족한 수면/식욕/성적에너지를 겪거나, 과한 혹은 부족한 식욕을 겪거나, 불면증을 겪는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지나치게 혼자만의 시간이나 핸드폰이나 인터넷, 게임 등에 집착한다든지, 스트레스를 분출하려고 약물, 술, 담배, 도박, 성적 일탈 등을 저지르기도 한다. 또한 증상이 구역질, 배탈이나 변비 등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한편, 이런 아빠 우울증은 산전에도 나타날 수 있고, 산후(출산후 1년 이내) 특히 아기가 3~6개월령일때 발생할 확률이 가장 높으며, 증상이 몇 년도 가는 경우가 있다. 연구들에 의하면, 아빠 우울증은 아기가 발달하는 첫 1년에 다대한 영향을 미쳐 5세 이후의 발달에서 아이가 문제행동이나 성격장애를 겪을 확률이 높다고 한다.
대표적인 육아 양상으로는, 아이의 요청, 질문, 반응 등에 아무 반응이 없는 경우, 노래를 불러주거나 책을 읽어줄 때 캐릭터 변화와 상관없이 단조롭고 에너지 없게 해준다거나, 아이에게 폭력적이 될 수 있다.
특히 일도 하는 아빠는 비현실적 상상인 ‘완벽한 아빠와 가장’이라는 생각을 버리는 게 좋다. 부부가 함께 산전부터 육아와 관련된 책을 읽거나 지식을 쌓으면 좋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에 대한 스트레스는 줄어들 것이다. 비슷한 처지의 육아빠들과 온오프라인으로 모임을 갖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대처가 빠를 수록’ 치료효과도 좋다. 심리상담이나 인지행동치료, 행동에 대한 비디오 녹화 판독, 항우울제의 복용 등이 전문가의 지도아래 이뤄지면 효과는 분명하게 나타난다. 의사들은 산전 혹은 산후 진료때 엄마의 산후 우울증 뿐 아니라 아빠의 산후 우울증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둘다 똑같은 산후 우울증 심리검사를 하는 것이 추천된다고.
이 문제를 다룬 BBC의 기사에는 실제인물인 소아과의사 아빠가 나오는데, 평소 ‘아이 낳으면 분명 좋은 아빠가 될 거에요’소리를 환자 부모들에게 듣던 그가 자신이 산후우울증인지도 모르고 있다가 아이를 폭력적으로 대하거나 학대할 지경에까지 이른 경우도 있다고 말해주고 있다. 그러니 누구도 아빠 산후우울증에 자동면역인 사람은 없는 셈이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바로 ‘내’ 이야기 그 자체였다. 그때 이런 정보를 알고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하지만 주변에는 말 섞을 사람 자체가 아예 없었다. 애틀랜타 신혼 생활 2년간 사귀었던 인연들은 흩어지거나 있더라도 우리가 시카고 있는 동안 그들은 이미 다른 친구가 생겨있었다.
차 면허가 없던 2021년의 여름은 내 인생에서 죽음이 가장 가까이 다가왔던 시기였다. 그 혹독한 시절을 어떻게 견디고 살아 남았는지는 가족과 친구들의 기도가 아니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한다. 아니 부부가 둘다 영어도 하고 미국 학위도 있는데 왜 이민을 포기하고 한국에 돌아가냐고. ‘내가 살아야 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나부터 살아야겠어서 말이다. 나는 생존자가 되었다. 지독한 아빠 산후우울증으로부터 말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싸우고 있다. 아이에게 따순 밥 한그릇 제대로 해먹이고, 진심으로 함께 잘 놀 수 있는 그 시간까지 나는 가야할 길이 멀다. 하지만 예전처럼 마냥 두렵고 외롭지만은 않다.
나는 힘든 와중에 딱 두가지는 지켰다. 아이를 안 다치게 하기와 아이가 부르면 반드시 응답하기. 그것들이 과도한 죄책감을 물리치는 최후의 보루였다. 지친 육아빠들에게 하고픈 조언이 있다. '시간이 지나 아이가 자라야 당신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매년 나아질 겁니다. 힘내세요.'
오늘도 비참하고 처진 마음으로 유아차를 정처없이 몰, 세상의 모든 산후우울증 엄마 아빠에게 위로와 격려를 빈다.
참고
As a new father, I was blindsided by postpartum depression. I’m not alone https://fortune.com/well/article/postpartum-depression-men/
Male postnatal depression: Why men struggle in silence https://www.bbc.com/worklife/article/20220601-male-postnatal-depression-why-men-struggle-in-silence
Paternal depression: “The silent pandemic”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9678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