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학과 언어학
말이나 문자를 사용하여 의사소통을 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전제는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를 공유한다는 점이다. '밥'이라는 언어 기호(말이든 소리이든 상관 없다)가 뜻하는 바는 화자가 말하는 바이면서 청자가 이해하는 바로서 동일한 것이어야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소리는 조금 다를 수 있어도 의미는 달라지면 안 된다.
한국어 사용자들 간의 대화에서 이 전제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일상에서 얼마나 있을까? 간혹 여자의 심리를 알 길이 없는 남자들도 말길을 못알아 듣는 것 뿐이지 여자가 하는 말(단어나 문장) 자체의 의미를 모르지는 않는다('모르는 것은 아니다'가 자연스러운데 왜 이렇게 비문처럼 느껴지는 '모르지는 않는다'로 쓰고 싶을까?? ㅎㅎ). 생각해 보면 언어 기호가 가지고 있는 사회성(즉 위 단락에서 말한 전제)을 의심할 수 있는 일상의 언어 생활은 거의 없을 것 같아 보일지 모른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대표적인 예가 의사와 환자 사이의 대화이다. 환자는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를 설명하는데 이게 그리 단순한 일은 아니다. '기침이 나요, 콧물이 나요, 열이 있어요, 두통이 있어요' 뭐 이런 정도로 병증을 판단할 수 있는 경우는 문제될 것이 없다. 예를 들면 신경통이나 심장 관련 증상을 설명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 '손가락 끝이 저려요.' '손가락 끝이 쥐가 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손가락 끝이 아픈 건 아닌데 간질간질한 것 같은 느낌이 있어요.' '손가락 끝이 살짝 시린 것 같기도 하고 아픈 것 같기도 하고 그래요.' '손가락 끝이 살짝 마비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 있어요.' '손가락 끝에 감각이 조금 무뎌지는 것 같아요.' 이게 손가락 끝이니까 그게 그거인 것 같지만, 종아리 근육이나 엉덩이이나 등 부위와 관련된 경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방사형 통증의 경우에는 환자가 통증 유발 지점을 정확하게 인식하기도 어려운 경우가 있다. 잠을 잘못 자서 목 주변 근육이 굳거나 해서 등이나 어깨까지 통증이 뻗치는 경험을 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병증을 판단할 때에는 통증의 유형도 중요한 고려 요인이다. 신경통은 근육통과는 통증의 성격이 다르다. 특정 근육 주변에서 느껴지는 시리거나 저리는 통증은 염증 반응으로 유발되는 통증과 다르다. 심한 운동 후에 알이 벤 경우의 통증은 염증성 통증과는 유사하지만 신경통 통증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언어 표현력이 충분하지 않은 환자가 통증 유형을 제대로 구별하지 않아서 어떤 통증을 설명할 때마다 '저리다', '쑤시다', '시리다', '맞은 듯하다' 등등의 표현을 섞어서 표현한다면 의사는 다른 검진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수도 있다. 간혹 '칼에 베인듯 쑤신다'고 말하는 사람을 보는데, 칼에 베인 상처 부위의 통증을 일반적으로 '쑤신다'고 하는지 생각해 보자. '쑤시는 통증'과 '욱신거리는 통증'은 또 어떻게 달랐던가? '욱신거리는 통증'과 '벌에 쏘인 듯한 통증'과 '피멍이 들었을 때의 통증'은 어떻게 달랐던가? 모두 같은 통증이었던가?
생각해 보면, 진료 상황에서 환자와 의사 사이의 대화에서 통증 부위와 통증 유형에 대한 표현들이 어느 정도 표준화되어 있어서 특정 표현은 특정 병증과 관련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런 표현들을 초등학교에서 교육한다면 정말 좋을 것이다. 모든 병증에 대해서 그렇게 할 수는 없겠지만 자주 발생하는 병증들에 대해서는 가능하지 않을까? 삐거나 부러진 경우, 두통의 유형별 통증, 감염으로 인한 통증이나 상처의 유형(찰과상, 자상 등)으로 인한 통증 등등. 여러 경우에 공통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통증들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정도의 표준화는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저리거나 시린 통증도 추운 방에 있을 때 느끼는 한기로 인한 느낌이나 물리치료 시에 전기 자극을 이용한 치료를 받을 때의 느낌 등을 통해서 특정한 자극 경험과 통증 유형을 정확하게 범주화하여 인식할 수 있도록 잘 교육하는 등의 방식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암 환자들이 겪는 통증은 암에 걸려 본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며, 암에 걸린 적이 없는 의사는 또 수련 과정에서 그런 통증을 어느 정도나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의사와 환자가 사용하는 언어가 의미하는 바는 단어의 모양이 같다고 해서 동일한 방식으로 이해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병증을 설명하고 진단할 때의 언어 상황에서는 어느 정도 표준화된 언어 표현이 있다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국어국문학과에서 한국어학을 전공하면 대체로 음운 규칙이나 문법 규칙을 주로 배운다. 사회에서 기대하는 전공 지식은 맞춤법 정도일까? 졸업 후에 언어학 지식은 거의 사용할 일이 없다. 하지만 실생활에서는 잘 정비하면 삶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정비해 봄직한 언어 현상들이 많이 있다. 메뉴얼 언어의 특징, 법조문의 언어적 특징, 광고 언어의 특징 등에 관한 연구 논문 어디를 찾아 봐도 담화화용 층위의 구조적 특징을 분석하기는 하지만 삶에 실제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어떤 연구는 찾아보기 어렵다. <재미로 전문가를 압도하는 담화분석>에서 언급한 정도랄까?
병증의 설명과 진단에 도움이 될 법한 표준적인 설명 방식에 대한 연구. 앞으로는 이런 연구들이 화용론 연구자들의 관심 대상이 되면 좋을 것 같다. 나는 정통 언어학자가 아니기도 하거니와 그런 연구는 쉽지도 않을 것 같고, 무엇보다도 나같은 이론가보다는 병원에 자주 다니는 공학도들이 더 잘 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