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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인 Oct 17. 2024

완벽주의 젊은 꼰대를 직속 상사로 만나면?

Part3. 지금 일을 평생 할 수 있을까? ep.13

시험을 포기하고 다시 구직 활동을 한다는 건 쉽지 않았다. 취업 시장에서 자격증 공부는 플러스 요인이 될 수 있겠단 희망은 착각이었다. 면접관 입장에서 나는 여러 회사를 다녔고(경력 5년 차에 네 군데), 결국 퇴사하고 세무사 공부에 도전했으나 1차 합격이라는 결과치도 없는 상황인 것이다. 면접관들은 내게 자격증 도전의 실패 사유와 잦은 이직에 관해 질문을 하였다. 나는 전문성을 쌓기 위해 퇴사하였고 막상 해보니 생각한 것 이상으로 오래 걸릴 것 같아 포기했다고 말하였다. 이직에 대해선 직장 상사와의 갈등 등 있는 그대로 답변하였다. 거짓을 고할 수 없어 솔직하게 면접에 임했으나 우려했던 대로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았다. 그들 눈엔 상사 말을 듣지 않은 직원임과 동시에 성급하게 도전하고 쉽게 포기해 버리는 성향으로 비추어졌으리라. 나도 딱히 그런 성향이 아니라고는 부정할 수 없었다.


시간은 흘러 구직 기간이 4개월을 넘어섰다. 학생 신분이 아닌 상태에서 이 정도 백수로 오래 살아 본 건 처음이었다. 코로나가 막 터졌을 때라 경기가 어려워져 면접 기회도 얼마 없었다. 이렇게 허송세월 보낼 줄 알았더라면 공부를 더 할 걸 그랬나 라는 생각이 들 때쯤 한 회사로부터 면접을 보자는 연락을 받았다.


면접관은 두 분이었는데 실무를 담당할 것으로 보이는 여자분이 주로 질문하였다. 그분은 지금껏 면접과는 다르게 내가 자격증 공부한 거와 상관없이 이전 회사에서 어떤 회계 프로그램을 사용하였는지와 그 숙련도, 그리고 업무 지식에 대해 질문을 하였다. 공부를 그만둔 지 얼마 되지 않아 암기한 회계세무 지식은 그 어느 때보다 충만하여 수월하게 답변했다. 또한 여러 회계 프로그램을 다뤄 본 경험도 높이 산 듯하였다(나중에 알고 보니 이 점이 가장 플러스 요소였다). 면접이 진행될수록 내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며칠 뒤 나는 그 회사로 출근하였다. 신기하게도 이 회사는 내가 다녔던 첫 회사와 같은 그룹 계열사였다. 모회사가 지분을 인수하여 그룹에 합류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회사였다. 심지어 전 회사와 같은 건물이었다. 본사는 충청도에 있는데 재무 부서(회계팀, 원가팀)만 그룹사와 가까이 여의도에 있었다. 본사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이 생소하였지만 회계 업무 특성상 타 부서들과 전화로 진행하는 일이 많아 오히려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룹사가 내가 다녔던 첫 회사였는데 그 당시에는 계약직으로 일을 했기 때문에 같은 그룹 정규직 직원이라는 것만으로도 회사 부심이 생겼다. 직급은 이전 회사 직급을 이어갔고 연봉은 지금껏 다녔던 회사보다 처우가 좋았다. 복지도 그룹사 규정을 따르고 있어 여러모로 만족스러웠다. 함께 입사한 동기도 있었는데 그 친구는 자금, 나는 회계를 맡았다. 입사 동기도 있겠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




입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은 받은 만큼 제값을 해야 한다는 말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이직 횟수도 많은 나를 받아준 이유가 있었다. 장부를 열어보니 해야 할 회계처리 양이 방대하였다. 보통 월이 끝나면 늦어도 다음 달 20일에는 장부가 마감되어 있어야 하는 게 정상이다. 입사 당시가 5월 중순이었는데 4월 장부 기록이 전혀 없었다. 회계는 회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매일매일 프로그램으로 장부 기록하는 게 정상인데 이게 되어 있지 않으면 결재 서류 하나하나씩 보면서 역으로 추리를 해나가야만 한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회사 내부 사정을 모르기 때문에 일은 갈수록 어려웠다. 통장에 돈이 찍혔는데 이 돈이 어디에서 들어왔는지를 출처를 몰라 찾아내야 했다. 기록이라도 해놨으면 좋으련만 그것조차도 되어 있지 않아 시간이 오래 걸렸다. 결국 회계 프로그램을 다룰 수 있으면서 경력과 실무지식이 뒷받침되어 알려주지 않아도 빨리빨리 처리해야 하므로 나는 이 회사에서 보면 적임자였던 셈이다. 하루빨리 이 회사 장부 처리를 해 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직속 상사는 면접관이었던 여자 과장님이었다. 깐깐해 보이는 외모와 어울리게 까칠한 말투를 갖고 있었다. 업무적으로 실력자가 분명하였다. 그동안 이 회사의 장부를 어찌어찌 끌고 간 건 이 분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부하 직원을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녀는 늘 완벽 그 자체를 원하였다. 하나라도 틀린 걸 발견하면 만사 제쳐놓고 그 자리에서 어떻게든 올바르게 고치도록 하였다. 일 배우기에는 좋지만 상황이 빨리 마감을 해야 하는데 과정에서 가르치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내가 입사하기 전에 이미 몇 명의 사람들이 그만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럴 수밖에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수정하는 건 당연히 중요하지만 과정에서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데도 그녀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완벽하게 a부터 z까지 하기를 요구했다. 매일 야근이 이어지고 주말 출근까지 강행되었다.


과장님은 일을 엄하게 가르치는 편이었다. 충청도에 있는 본사로까지 직원들 사이에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사람으로 소문나 있었다. 나도 여러 상사를 뵈어 왔지만 가장 나이 차이가 적게 나는데도(2살 차이) 엄하고 무섭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그만큼 배우는 건 많았지만 직장이 ‘배움’만 있는 건 아니니까. 호되고 엄격한 오전 업무가 끝나고 이후 함께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는 ‘불편함’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사람들이 본인을 무서워한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고 그걸 뿌듯하게 여기고 즐기었다. 업무 외적인 식사나 회식과 같은 자리에서는 부하 직원에게 업무로 지적할 게 없으니 장난으로 꼰대스러움을 분출하였다. 그동안 맷집이 두꺼워져서인지 나는 지금까지 겪었던 상사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애교 수준이라고 생각하였다. 시키는 일만 잘하면 절대 실력으로 뭐라고 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빠릿빠릿하게 일을 잘하는 게 중요하였다.


한 달 뒤, 같이 입사한 동기가 퇴사하였다. 완벽주의 상사 밑에서 그 친구는 늘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압박감이 심하여 감당하기 힘들어했다. 이후 인원 충원으로 2명이 더 입사하였는데 얼마 뒤 그들도 퇴사하였다. 밑에 직원들이 줄줄이 퇴사한 이후 어지러운 상황에서 과장은 그 위 상사와 갈등이 생겼다. 돌연 그녀도 사표를 제출하였다. 회계팀에는 과장님을 대신할 신입 부장님과 나만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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