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로토닌이 필요해

우울증 엄마의 상담일지 08

by 오늘


잠이 오지 않아 새벽에 신경안정제를 여러 알 먹었더니 녁까지 몽롱하다. 몽롱한 기분으로 쓰는 상담 일지. 정신병원을 세 번째로 옮기게 된 까닭은 시시하게도 이사 때문이었다. 이사가 아니었다면 계속 전 병원에 다녔을 이다.

시장통 한가운데 있는 새로운 병원은 주차하기가 까다로워서 갈 때마다 망설여졌다. 초보운전이라 남편을 꼭 대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별 것 아닌 일이 우울증 환자에게는 장애물이 된다. 허들 같은 거다. 사소한 과정이 체육시간의 허들처럼 느껴져 결국 일상이 장애물 넘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 병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의사 선생님은 드라이하다 못해 바삭바삭할 정도로 건조하신 분이었으며 상담은 5분도 채 하지 않았다. 설문지를 작성한 후 약 처방을 받았는데, 일단 몇 주는 전 병원과 같은 약으로 그 이후에는 선생님의 판단 아래 감량과 증량을 하게 되었다. 음...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상담자로서는 꽝!이었지만 신경정신과 의사 선생님으로서는 괜찮았다고 해야 할까. 리송하다. 이건 현재 진행형. 이번 주에도 병원을 다녀왔으니 아직 고민 중이라고 해야 옳다. 병원을 옮길까 말까.


이전 병원에서는 내가 이상 증상을 호소할 때마다 신경안정제를 증량해주었다. 그 덕에 안정은 되었지만 무기력은 나아지지 않았던 상태였다. 무기력이 나아지지 않으니 근본적 우울은 그대로였다. 억제할 힘이 조금 더 생겼을 뿐.

옮긴 병원에서는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몸속에 생성된 세로토닌이 다시 체 내로 재흡수되는 것을 막아 일정량의 세로토닌이 유지되도록 하는 약물이라고 알고 있다. 자세한 것은 초록창으로)의 양을 두 배 가까이 증량을 하고 신경안정제는 더 이상 절대로 증량하지 않을 것이며 차차 감량할 계획이라고 말씀하셨다.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를 증량하고 난 뒤에 눈에 띄는 변화가 생겼다. 첫 번째로 집중력 향상. 아이를 낳고 난 뒤에 머리기 팝콘이 되었는지 짧은 유튜브 영상이나 뉴스레터, 맘 카페 글, 웹툰 같은 스낵 컬처가 아니면 머릿속에서 전혀 소화가 되지 않았다. 한 권의 책을 끝까지 읽은 것이 손에 꼽힐 정도였는데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를 증량한 후 급격히 집중력이 올라 전문서적을 일주일에 세 권 꼴로 읽을 정도 변화가 찾아왔다.

모든 일에 대해 워밍업을 하는 시간이 짧아져 생각과 실행 사이의 간극이 줄어들었다. 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난 뒤에도 침대에 시체처럼 가만히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시간을 보내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책을 읽고 새로운 글을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집안일을 하고, 영화를 본다. 이런 것이 내게는 노는 게 아니라 직업이자 일이라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다.


나는 의사 선생님에게 상담에 대한 기대는 하지 않고 증상만을 말한다. 모두들 알았으면 좋겠다. 신경정신과 의사 선생님은 심리상담사가 아니다. 그래서 상담에 시간을 투자하는 분이 계시는 반면 증상을 듣고 처방만 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신다. 후자에게 전자를 기대하면 큰 상처를 받을 수 있다. 이번에 만난 선생님도 상담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셨지만 내 증상에 대한 처방은 아주 정확하셨으니 상담을 잘하는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이라고 말하기도 힘들다. 본인에게 잘 맞는 병원을 찾기 위해서는 여러 번 병원을 바꿔야 할 수 있다.


정신과 약물은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단약을 하는 과정도 쉽지 않은데, 이번 병원 선생님 같은 경우에는 처음부터 신경안정제를 단약 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보이셔서 조금 부담스럽다. 이제 겨우 안정을 찾기 시작했는데 벌써 단약이라니...


아이가 심하게 아픈 바람에 약이 떨어지고도 난 일주일을 병원을 못 갔었는데, 그것을 약 없이 '괜찮다'라고 판단하셨 보다.

"이 참에 신경안정제는 끊죠."

워낙 빠른 진료를 하시니 뭐라 말할 틈도 없어서 해명을 못했는데 아이는 열이 39도, 나는 38도를 넘었고 아이가 좋아지는 동안 나는 스트레스로 인해 위경련이 왔고 몸살에 감기를 앓았다. 잠은 자는 둥 마는 둥 했다. 약을 타지 않고도 괜찮았던 게 아니라 약을 타러 갈 수가 없었다.

일상을 설명하자니 자질구레하고, 또 의사 말을 따르자니 엄두가 안 난다.

"제가 불안해요."

나는 아직 불안하다고 말했다. 약을 안 먹고도 버틸 수는 있겠지만 약이 없다고 생각하면 불안하다고. 의사 선생님은 알겠다며 한 달 더 유지하기로 하고 같은 약으로 처방해주셨다.

병원을 바꿀까? 잠깐 생각을 하다가 말았다. 처방이 잘 듣는 게 우선이다. 다음에는 의사 선생님의 권유대로 신경안정제를 조금씩 감량해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다시 견디기 힘들면 증량을 해야겠지. 그리고 다시 차차 감량해야 할 테고.. 렇게 오늘을 내일을 살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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