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발상, 서양철학, 영미법, 미메시스, 부실표시, 야누스적 사고
『도덕경』 2장 첫 문장은 단 열한 개의 글자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해석은 매우 다양하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악이)
‘세상(天下) 사람들은 모두(皆) 아름다움이 아름다운 것이 되는 것(美之爲美)으로 알지만(知),
그것은(斯) 추함일 뿐이다(惡已).’(직역)
이 문장의 해석이 다양하게 나뉘는 이유는 ‘爲’의 의미, 지시대명사 ‘斯’가 가리키는 대상, 그리고 ‘已’ 앞의 해석방식에 따라 전체 의미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옛날 한문에는 띄어쓰기도 없었고, 3화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자는 맥락에 크게 의존하는 언어이기 때문에 해석의 여지가 더욱 넓어진다.
기존 학자들의 해석은 네 가지 관점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각 주장들의 이름은 임의로 지었고, 분류 자체는 참고문헌 이종상의 글에 근거):
1. 상대적 가치관론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알고 있는데, 그 아름다움은 추함이다.”
이 해석에서는 ’斯(그것)’이 ’美(아름다움)’를 가리킨다. 이는 세상에 절대적인 아름다움의 개념은 없고,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결정되므로 상대적인 가치 판단을 넘어서야 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김학주, 福永, 양방웅, 조현규, 김상철, 금선학회, 김경탁, 김용옥, 오진탁, 유일한, 김항배, 신동준, 천병돈, 임채우, 이현주, 리링, 이수정 등).
2. 범주적 인식론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은 추함이다.”
여기서 ’斯(그것)’은 ’知(알고 있는 것)’를 가리킨다. 인간이 만든 가치 기준에 갇히면 오히려 더 높은 차원의 아름다움과 선에서 멀어진다는 의미이다(김형효, 권광호, 최진석, 설순남, 권오현, 안정근, 신현중, 장치청, 이용주 등).
3. 관계적 결정론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은 추함이 있기 때문이다.”
이 관점은 아름다움과 추함이 서로 의존하여 존재한다는 상호 관계성을 강조한다. 추함이 있기에 아름다움이 정의된다는 상대적 개념이다(蜂屋, 유희재 외, 금장태 외, 稻田, 오강남, 김학목, 임헌규, 박종혁, 안성재, Chen, Waley, Lynn 등).
4. 인지적 생성론
“세상 사람들은 모두 美의 아름다움을 아는데, 그러한 美의 개념은 醜(추)하다는 개념을 낳는다.”
이 해석은 아름다움이라는 관념이 생기면 필연적으로 추함이라는 관념도 함께 생겨난다는 의미이다(김충렬, 장기근, 최재목・박종연, 장순용, 이석명, Chan, Bruce 등).
3화에서 살펴본 것처럼 영어가 한국어보다 더 세분화된 분석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다의적인 한자를 영어로 번역할 때는 동일한 용어가 없는 이상 맥락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의미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문 번역을 통해 『도덕경』의 의미를 살펴보면 좀 더 이해가 쉽다.
Bruce R. Linnell, PhD의 번역을 살펴본다.
“In the world, when all know that the action of beauty is beautiful, then ugliness ensues.”
(세상에서, 모든 사람이 아름다움의 작용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때 추함이 생겨난다)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이 정의되는 순간, 그 반대 개념인 추함도 필연적으로 함께 생성된다는 의미이므로 이 번역은 ‘인지적 생성론’의 관점을 취하고 있다. 이는 개념의 생성과 인식에 초점을 맞춘 해석으로, 우리의 인지 체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준다.
2장 중반부의 내용을 고려하면 ‘관계적 결정론’과 ‘인지적 생성론’이 가장 타당한 해석으로 보인다. 이 두 관점은 정적 해석(관계적 결정론)과 동적 해석(인지적 생성론)의 차이일 뿐, 본질적으로 유사한 입장을 취한다.
중반부의 내용은 아래와 같이 상대성 이론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이 서로를 낳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이루며,
긺과 짧음은 서로를 나타내고,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대며,
음과 소리는 서로 어울리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직역)
(故有無相生,難易相成,長短相形,高下相傾,音聲相和,前後相隨)
(고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형,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
이 맥락에서 볼 때, 첫 문장에서 아름다움과 추함 역시 서로를 정의하는 상대적 개념으로, 우리가 이를 인식하는 순간 함께 생성되며, 서로를 정의하면서 우리의 인식체계에 들어온다는 뜻이니 맥락적으로 자연스럽다. 첫 문장에서 상대적 개념의 생성 원리를 설명하고, 중반부는 그 예시들을 이야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중반부의 시작이 ‘고로(故, 그러므로)’이므로 첫 문장에서 이야기한 내용과 중반부 상대성 이론은 인과관계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위 ‘1. 상대적 가치관론’이나 ‘2. 범주적 인식론’은 중반부의 상대성 이론과는 비교적 독립적인 내용이고, 이것을 인과관계로 해석하면 인위적이며 자연스럽지 않다.
따라서 2장 중반부의 맥락을 고려하면 ‘관계적 결정론’과 ‘인지적 생성론’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만으로는 2장 후반부 첫 문장의 내용을 완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후반부의 직역은 다음과 같다.
이런 까닭으로 성인은 무위의 일에 거처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한다.
(是以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시이성인 처무무지사 행불언지교)
영문 번역:
Thus the sage: Lives by using non-action in his duties, and practicing no-talking in his teachings.
관계적 결정론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오강남).
"따라서 성인은 무위로써 일을 처리하고,
말로 하지 않는 가르침을 수행합니다."
관계적 결정론과 인지적 생성론에 최대한 부합하게 의역해 보면,
“아름다움과 선도 모두 우리가 개념화해서 인지하는 순간 만들어지는 개념이므로, 성인은 무엇이 아름답다거나 선하다고 말해서 잘못 개념화시키지 말고, 행동으로 가르쳐라.”라는 의미이다.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인위적이고, 자연스럽지 않다.
2장의 완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인지적 생성론과 관계적 결정론을 넘어서는 더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
기존 견해들의 벽에 부딪혔을 때, 혹시 한자 '위(爲)’가 양면성을 지닌 ‘야누스 월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이에 대해 추적 결과, 흥미로운 발견이 있었다.
’할 위(爲)’의 의미를 살펴보면, ‘하다’, ‘행하다’, ‘위하다’, ‘되다’, ‘생각하다’, ‘배우다’, ‘만들다’ 등 가치중립적인 의미가 있지만, 동시에 ‘가장하다’라는 부정적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사전).
이러한 부정적 의미는 다양한 한자로 파생되어 더욱 구체화된다:
•사람(人) 부수를 더해 ‘사람이 가장한다’는 '거짓 위(僞)’가 되었고, 이는 ‘위선’, ‘위조’, ‘위증’, ‘허위’ 등의 개념을 표현한다.
•입구(口) 부수를 더해 ‘입으로 가장한다’는 '거짓말 위(噅)’가 되어 ‘거짓말’, ‘거짓말하다’, ‘추하다’의 의미를 갖는다.
•말씀(言) 부수를 더해 ‘말을 통해 가장된다’는 '잘못될 와(譌)’가 되어 ‘와자’(잘못 쓰이는 글자)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동물들도 생존을 위해 가장하는 행위를 한다. 침묵(부작위)이나 행동을 통해서도 가장 할 수 있다. '위(爲)’는 이처럼 가장하는 행위라는 포괄적 개념을 담고 있으며, 다양한 부수를 통해 그 의미를 세분했다.
즉, 가장하는 것의 반대말은 가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는 것이니, '위(爲)’는 내 속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과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라는 상반된 두 의미를 동시에 품고 있는 야누스 월드인 것이다.
[물론, 위(爲)는 다의어이고, 야누스 월드인 다의어도 있음은 3화 동철대립어와 6화 참고문헌(왕사우의 글)을 참조.]
기존의 학자들이 제시한 관계적 결정론과 인지적 생성론은 '위(爲)’의 한 측면을 잘 분석했다. 그러나 ‘가장하는 행위’라는 나머지 측면을 2장 첫 문장에 적용하면 전혀 다른 의미가 드러난다.
『도덕경』 2장 첫 문장을 다시 살펴보면,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악이)
인지적 생성론에 따른 해석:
“세상 사람들은 모두 美의 아름다움을 아는데,
그러한 美의 개념은 醜(추)하다는 개념을 낳는다.”
아름다움의 반대는 추함이다. 그래서 관계적 결정론과 인지적 생성론은 2장 첫 문장의 마지막의 ‘斯惡已(사악이)’에서 ‘악(惡)’을 ‘추(醜)’로 ‘의역’했다. 영문도 '악(惡)'을 ‘ugliness’로 번역했다. 물론 악(惡)에 추하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런데 '위(爲)’의 나머지 반쪽 얼굴을 적용하면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은 아름답지 않은데)
아름다운 척하는 것이면,
이런 행위는 악한 것(惡)이다.”
이 해석은 문장 자체로도 훨씬 자연스럽다.
또한 2장 두 번째 문장은 첫 번째 문장과 동일한 구조로, ‘미(美)’의 자리에 ‘선(善)’이, ‘악(惡)’의 자리에 ‘불선(不善)’이 들어가고 나머지는 동일하다.
두 번째 문장: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
첫 번째 문장: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악이)
즉, 선과 불선이라는 대립되는 용어를 썼다. 그런데 첫 번째 문장에서는 미(美)의 반대말인 추(醜)를 쓰지 않고, 추(醜)의 의미를 포함하나 악하다는 뜻을 가진 악(惡)이라는 용어를 썼다.
따라서 합리적으로 추론해 보면 노자는 ‘미(美)’에 반대되는 ‘추(醜)’ 대신에 의도적으로 ‘악(惡)’이라는 말을 쓴 것이고, ‘악(惡)’의 의미에 가장 부합하는 해석은 ‘위(爲)’의 이중적 의미, 특히 ‘가장하는 행위’라는 측면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아름답지도 않은 것이 아름다운 것으로 가장하면 ‘추(醜)하지는’ 않다. 아름답게 가장되었을 테니 외관은 아름다울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행위 그 자체는’ 악(惡)하다. 거짓되기 때문이다.
이때 불현듯 그리스 철학의 ‘미메시스’(µιµηστζ, Mimesis) 개념이 떠올랐다. Mimesis는 모방이라는 뜻이다.
이는 주술행위의 묘사에서 유래했으며 대상을 자신의 것으로 동화시켜 재해석하고 표현하는 것으로, 대상이 하나의 이념이 될 수도 있고, 인간의 행위, 자연, 정신이 될 수도 있다.
미메시스의 영문 번역이 바로 ‘representation’이다. 이는 ‘re-present’, 즉 어떤 대상을 ‘다시 나타낸다’는 의미로, 인식론에서는 ‘표방’이라고도 한다.
정치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대의민주주의가 바로 ‘representative democracy’이다. 선출된 권력이 국민의 뜻을 대표해서 통치한다는 의미이다.
이걸 깨달은 순간 Representation의 반대인 영미법상 Misrepresentation 개념이 떠올랐다. 부실표시라고 번역하는데 우리 법에는 없는 개념이다(Fraud와 별도의 개념). 침묵으로도 가능하며 사기와 달리 고의성이 요구되지는 않는다.
한국 대법원이 판례로 형성한 '상대방에 의해 유발된 동기의 착오’와 비슷하며, 계약법(Contract)에서 계약취소사유가 되고, 불법행위법(Torts)에서는 손해배상사유가 된다. 법무부가 2025. 2. 7. 입법예고한 민법 개정안에는 영미법의 부실표시와 유사한 ‘상대방이 유발한 착오’를 독립적인 의사표시 취소사유로 규정하고 있다(양창수 전 대법관의 설명).
한마디로 사기에 잘 포착되지는 않는데 교묘하게 사기와 유사한 개념으로, 예를 들어 중고차를 팔면서 약간 침수된 이력이 있는데 상대방이 물어보지 않으면 침묵하고 그냥 파는 경우와 같이 개별적인 케이스에 따라 한국법상의 사기로 포착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경우를 말한다.
이렇게 연결된 미메시스 개념과 영미법상의 Misrepresentation이 융합되니 '위(爲)’의 의미가 더욱 명확해졌다.
군주가 국민의 뜻을 그대로 잘 대표하는 것이 ‘representation’이고, 잘못 대표하는 것, 특히 교묘하게 잘못 대표해서 국민들이 마치 군주가 자신들의 뜻을 잘 대표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 ‘misrepresentation’이다.
노자는 이러한 이중적 의미를 가진 '위(爲)’를 활용하여 『도덕경』에 정치철학으로서 ‘Representation’과 ‘Misrepresentation’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담아내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조합된 개념들을 가지고 한 발 더 내디뎌야 한다.
다음 화로 이어진다.
노자는 '위(爲)’라는 개념을 통해 동양 철학 속에 담긴 '야누스적 사고(Janusian Thinking)'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도덕경은 서구에서 발견된 창의적 사고방식인 '야누스적 사고’의 본질을 놀랍도록 정확히 구현하고 있다 [10화-주 1 창의성의 숨겨진 비밀: 야누스적 사고].
동북아시아의 한자 문화권은 오랜 역사 속에서 모순을 포용하는 사고방식을 발전시켜 왔다. 특히 시대를 거치며 다양한 해석과 주석이 더해진 『도덕경』은 이러한 동아시아적 사고의 정수를 담고 있다. 인지심리학자 리처드 니스벳이 『생각의 지도』에서 지적했듯, 동양적 사고는 모순된 요소들의 공존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특성을 보인다.
이처럼 서구의 야누스적 사고와 동양의 모순 포용적 사고는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발전했지만, 창의성의 근원이라는 공통점을 보인다. 이는 인간의 창의적 사고가 문화와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시사한다.
마지막까지 읽고 나면(or 읽어내면^^) 이 글도 야누스적 사고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