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벌레, 버팀, 견딤, 긴츠기, 도선사업힐, 라우타바라, 북극의 노래
서울의 동트는 어느 새벽 녘,
서울 최강 업힐 라이딩 코스 도.도.도선사를 올랐다.
페달이 오르막을 따라 조용히 회전할 때,
한산한 숲에서 은은하게 퍼지는 아침 공기는
새로움으로 폐부를 가득 채운다.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손님이 여정에 합류했다.
갈색 점박이 무늬의 작은 애벌레 하나가
허벅지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반사적으로 털어내려 했지만,
한 손을 조심스레 뻗다가 중심을 잃을뻔 했고
어쩔 수 없이 다시 핸들바를 움켜쥐었다.
하마터먼 오르막 비탈에서 넘어질 뻔 했다.
그렇게 오르막을 오르는 동안,
나는 그 조그만 존재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이 조그마한 생명체는 얼마나 끈질긴가.
내 움직임, 불어오는 바람, 지면의 진동,
그리고 내 위협 속에서도 미세한 발톱 하나로 버틴다.
처음엔 침입자로 여겼던 이 작은 존재가
이제는 버팀의 대가처럼 느껴진다.
정상에 도달했을 때 나는 멈춰섰다.
서울 도심이 아련하게 저멀리 펼쳐져 있다.
나는 이 작은 동행자의 사진을 찍은 뒤
조심스럽게 놓아줬다.
날아가렴
애벌레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비록 지금은 날개를 가질 때가 아니더라도.
‘Larva’는 라틴어로 ‘유령’ 또는 ‘가면’을 뜻한다.
전혀 다른 생명체가 그 속에 숨어 있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정체성을 품은 존재.
번데기도, 날개도,
찬란한 비행도 아직은 없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결코 텅 빈 것이 아니다.
연약하지만, 단단하다.
숲속에서는 무수한 포식자들이 이들을 노린다.
가지 사이로 날아다니는 새,
먹이를 찾는 설치류,
서로를 잡아먹는 곤충들.
단백질로 가득하고 느리게 움직이는 애벌레는
생존 경쟁의 정점에 선
가장 완벽한 사냥감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살아남는다.
우리를 구원할 것은
언젠가 되기를 바라는
찬란한 나비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견디고 있는
애벌레의 끈기,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닮아야 할
생존의 형상이다.
가만히 생각해본다.
우리 모두,
일종의 애벌레가 아닌가?
인공지능이 계약서를 쓰고,
인구는 줄어드는 반면, 분열은 심화되며,
마음의 안녕이 점점 더 위태로워지는 이 시대에—
우리는 모두 현재라는 허벅지에 매달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치인은 논쟁하고, 지구는 뜨거워진다.
디지털 인터페이스는 인간의 손길을 대체하고,
외로움은 전염병처럼 번져간다.
우리는 불확실성의 숲에 서 있고,
불안이라는 포식자들이 머리 위를 맴돈다.
우리가 바라는 변형과 비상은,
결코 단숨에 하늘을 나는 것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흔들림 속에 버티는 용기에서,
아름다움이 아니라 끈질김에서,
공중의 자유가 아니라
물러서지 않는 견딤에서 시작된다.
일본 철학에는 긴츠기(kintsugi)라는 개념이 있다.
깨진 도자기를 금으로 꿰매어
오히려 균열을 강조하는 기술이다.
상처를 숨기지 않고,
상처를 통해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예술이다.
어쩌면 회복력이라는 것도 그러하지 않을까.
흠 없음이 아니라,
흠집을 안은 채 살아내는 장엄한 방식.
나는 그날 아침,
애벌레에게 철학을 한 수 배울 줄은 몰랐다.
그러나 도선사에서 내려오는 길,
내 생각은 어딘가 바뀌어 있었다.
처음엔 떨쳐내려 했던 그 조그만 생명체가,
이제는 나의 스승이 되어 있었다.
나는 꿈꾼다.
애벌레가 나는 꿈을
미래의 나비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애벌레 그대로.
버티고,
존재하고,
변화 이전의 생존에 가장 적합한 모습으로.
이 격동의 시대에,
우리 모두 그런 견딤과 회복력을
스스로 안에서 찾을 수 있기를.
변형 이전에 견딤이,
아름다움 이전에 버팀이
있음을 잊지 않기를.
그리고 세상이 짓누를 때,
가장 작은 존재조차
가장 위대한 교사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기를.
나는 다시 꿈꾼다.
애벌레가 난다.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
날개가 없을지라도,
그것만으로도
완전한 날개짓으로
도선사 업힐은 서울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은 자전거 업힐 코스 중 하나로, ‘서울 업힐의 끝판왕’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많은 라이더들에게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곳입니다.
위치: 북한산 우이동 도선사 입구에서 시작
접근 방법:
- 한강 자전거길 → 중랑천 자전거길 → 우이천 자전거길을 따라가면 95% 이상 자전거도로로 접근 가능.
- 지하철 4호선 수유역 1번 출구 → 강북구청사거리 → 광산사거리 → 국립4.19묘지입구사거리 → 102번종점(삼양로173길) → 우이동입구 → 도선사 업힐 시작점(통곡의 벽).
총 거리: 약 1.15~1.2km(공식 계측 구간 기준).
상승 고도: 약 300m(창동 출발 기준).
평균 경사도: 약 13~14.5%.
최고 경사도: 순간적으로 31.8%까지 치솟는 구간 존재.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초입 급경사 구간이 매우 유명.
전체적으로 구간은 짧으나, 경사가 매우 급해 초보자는 대부분 ‘끌바’(자전거를 끌고 오르기)를 경험하게 됨.
구간 중간에 잠시 경사가 완만해지는 지점이 있으나, 대부분은 힘든 오르막.
정상에는 불상과 주차장, 카페, 화장실 등이 있어 휴식 가능.
난이도: 서울 시내 업힐 중 최고 난이도. 남산, 북악 등 다른 서울 업힐보다 경사가 두 배 이상 가파름.
안전: 차량, 등산객이 많으니 반드시 주의 필요. 다운힐 시에도 급경사라 브레이킹에 신경 써야 함.
장비 팁: 로드바이크라면 컴팩트 크랭크(50-34T 등) 추천, MTB는 상대적으로 수월.
자연과 함께한 심포니 에이노유하니 라우타바라(Einojuhani Rautavaara)의 《Cantus Arcticus: 북극의 노래》(1972)는 현대 클래식 음악사에서 독특하면서도 감각적으로 탁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협주명상(symphonic meditation)이다.
이 작품은 단순히 자연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북극 지방에서 녹음된 새들의 소리를 전자 테이프를 통해 오케스트라와 동시 연주되도록 구성된 “새와 인간이 함께 부르는 협주곡”이다.
* 에이노유하니 라우타바라(Einojuhani Rautavaara, 1928–2016)
에이노유하니 라우타바라는 핀란드를 대표하는 20세기 후반 현대음악 작곡가로, 북유럽의 전통성과 영성, 현대적 감각을 유기적으로 융합한 음악 언어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그는 시벨리우스의 뒤를 잇는 핀란드 음악의 계승자로 불리며, 죽기 직전까지도 실험성과 서정성을 잃지 않은 작곡가다.
에이노유하니 라우타바라(Einojuhani Rautavaara)라는 이름은 핀란드식 이름으로, 각각의 단어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이 연결되어 한 사람의 정체성과 배경을 드러냅니다.
• 이름의 구조와 의미
“에이노유하니(Einojuhani)“는 두 개의 핀란드 남성 이름, 즉 “에이노(Eino)“와 “유하니(Juhani)“가 결합된 형태입니다.
- “에이노”는 “유일한” 또는 “한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 “유하니”는 요한(Johannes, John)의 핀란드식 변형으로, “하느님은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에이노유하니”라는 이름은 “유일한(한 사람)이며, 하느님의 은혜를 받은 자”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 성의 의미
“라우타바라(Rautavaara)“는 핀란드어로 “라우타(rauta)“가 “철”, “바라(vaara)“가 “언덕” 또는 “산”을 의미합니다. 즉, “철의 언덕” 또는 “철산”이라는 뜻이 됩니다.
•전체 이름의 연결된 의미
이 모든 의미를 연결하면, “에이노유하니 라우타바라”는 “유일하고 하느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철의 언덕(철산)의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처럼 핀란드식 이름은 개인의 정체성과 가족, 자연 환경과의 연결을 담고 있어, 한 사람의 배경과 세계관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출생: 1928년 10월 9일, 헬싱키
사망: 2016년 7월 27일, 헬싱키
교육: 시벨리우스 아카데미(Sibelius Academy)에서 작곡 공부, 미국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빈센트 퍼시케티(Vincent Persichetti), 아론 코플랜드(Aaron Copland)에게 사사, 스위스, 독일, 오스트리아 등 유럽 각지에서 다양한 전통과 현대 양식을 습득
라우타바라는 초기에는 12음 기법과 세리얼리즘(serialism)에 기반한 음악을 시도했으나, 곧 신낭만주의(neoromanticism)와 영적 주제, 핀란드 자연과 신화로 관심을 옮기며 자신만의 독자적 스타일을 구축한다.
형식의 유연성과 감정의 선율성
현대음악의 실험정신을 유지하면서도, 선율 중심의 음악적 언어를 회복함.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시벨리우스의 영향을 받아 오케스트레이션이 풍부하고 색채적.
초월적 주제와 영성 작품 다수는 신비주의, 천사, 죽음 이후의 세계, 자연의 순환 등 초월적 상징을 다룸.
대표작 《Angels and Visitations》, 《Symphony No.7 “Angel of Light”》는 현대 클래식에서 보기 드문 기독교 영성음악.
핀란드적 자연 이미지의 구현
《Cantus Arcticus》를 비롯한 여러 작품은 핀란드 자연과 북극 생태계를 음악으로 형상화.
새 소리, 바람, 고요한 설원 등이 오케스트라와 전자음향을 통해 정교하게 재현됨.
《Cantus Arcticus》, Op. 61 – 새의 소리를 악보에 도입한 획기적인 작품
《Symphony No. 7 “Angel of Light”》 – 라우타바라 음악의 영적 정수
《Concerto for Birds and Orchestra》 –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음악화
《Piano Concerto No. 3 “Gift of Dreams”》 – 후기 신낭만주의적 서정의 정점
“나는 음악이 인간의 가장 깊은 감정, 영적 요구, 존재의 신비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 라우타바라, 1990년대 인터뷰 중
그의 음악은 현대적이면서도 듣는 이를 배제하지 않으며,
자연과 인간, 존재와 초월의 경계에서 ‘사색적 음악’이라는 장르를 개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