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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을 찾아가는 여정 1- 언어(하)

고맥락 문화, 문화인류학, 국제중재, 성격증거, 인지심리학, 사회심리학

by 법의 풍경 Mar 14. 2025

(표지 그림: 명대(1368-1644) 화가인 심주(沈周, 1427-1509)가 1467년에 여산의 가을 웅장한 산세를 표현한 여산고도(廬山高圖): 그림의 시문(詩文)은 여산고(廬山高),  그림 출처) [주 1-여산고의 내용]  


언어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지기보다는 인간이 언어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 피히테(독일 철학자)의 '독일 국민에게 고함(Reden an die deutsche Nation)’ 中 [주 2-배경 설명]


'고맥락/저맥락 문화' 용어의 탄생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dward Hall)은 정보전달 방식에 따라 동양문화를 ‘고맥락 문화(High Context)’, 서양문화를 ‘저맥락 문화(Low Context)’로 처음 구분하였다.  


말이나 문자와 같은 의사소통 수단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수록 저맥락 문화이고, 우회적인 표현이 많을수록 고맥락 문화에 해당한다.


즉,’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문화'가 고맥락 문화이고, '말을 해야 알 수 있는 문화'가 저맥락 문화다. ‘거시기’, ‘알아서 모셔라’, ‘이심전심’ 같은 표현은 구체적인 설명 없이 맥락을 통해 이해해야 하는 고맥락문화를 잘 보여준다.


유학파들이 본 한국언어


저맥락과 고맥락 문화를 오가며 살아본 사람들은 이런 문화의 차이를 잘 인식한다. 저맥락 문화에서 생활했던 친한 동생이 내게 했던 뼈에 닿는 말이다.

한국 사람들은 타인의 말에서 빠진 주어/목적어/동사를 보충하고 목소리에서 읽히는 감정/의도를 반영하여, 상대방의 말 전체를 스스로 재해석한 뒤에 받아들이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어요.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형성되는 것 같아요.
의사소통 과정에서 감정/의도 등을 완전히 배제한 채로, 객관적인 정보만 주고받으며 토론을 하는 것도 어려운 것 같구요...(반말하면서 목소리 커지면 무조건 싸움)
다만, 한국어는 높낮이/길이/강조의 영역을 통째로 감정/의도만을 전달하는 데에 활용하다 보니, 감정 전달을 풍부하게 해서 한국어만큼 '진심을 주고받는' 의사소통이 가능한 언어는 잘 없는 것 같아요.


문화인류학자의 답


위와 같은 분석에 대해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그의 저서 '문화를 넘어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고맥락 문화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저맥락 문화에서 성장한 사람들보다도 타인에게 많은 것을 기대한다. 이들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할 때 상대방이 자신이 하려는 말을 이미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여긴다.


따라서 핵심을 직접적으로 전달하기보다 돌려서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으며, 핵심을 집어내는 일은 듣는 사람의 몫이 된다. 오히려 화자가 핵심을 직접 말해 주는 것은 듣는 사람의 지적 능력을 무시하는 모욕이자 침범으로 여겨질 수 있다.


화자의 자세한 설명을 듣는 청자의 속마음은 아마 이럴 것이다.

(아니 누굴 바보로 아나? 그런 건 굳이 말 안 해도 다 알고 있다고!)

“예예, 예예”

(그만 설명해라. 나도 안다니까.)

국제중재에서 나타나는 현상


이러한 현상은 저맥락 문화권의 외국인 국제중재인이 고맥락 문화권인 한국의 분쟁을 판단할 때도 나타난다.


외국 투자자가 직·간접으로 연관된 계약은 한국어로 작성되었더라도 분쟁 해결 방법으로 국제중재가 선택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계약 당사자 중 한쪽이 국가, 국가기관, 지방자치단체인 경우, 한국 사법부가 이해상충으로 인해 공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국제중재가 선호되기도 한다.


국제중재에서는 보통 각 당사자가 한 명씩 중재인을 지명하고, 그 두 명이 합의해 의장중재인을 선정하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이 과정에서 대개 저맥락 문화권 출신의 외국인이 중재인으로 선정된다.


외국인 중재인들은 한국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각 당사자들을 로스쿨 교수 등을 전문가 증인으로 섭외해 쟁점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하고, 중재 절차에서 증언하도록 한다.


‘상황문맥’과 ‘한국법문화’를 모르는 저맥락 문화의 외국인들에게 한국법과 한국계약서는 낯설다. 그래서 당사자들은 한국 법원에서는 문제 삼지 않을 한국법이나 계약서의 내용도 자기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주장하며, 전문가 증인이 이를 뒷받침하기도 한다.


이런 저맥락 문화권 출신 외국 중재인들의 신선한 시선은 오해를 낳을 수도 있지만, 4화 [주석 4]에서 언급한 것처럼, 외국 중재인은 ‘산 밖에서 산을 바라보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더 정확한 평가를 내릴 수도 있다.


국제중재인, 국제중재 변호사의 역량


이것은 마치 ‘한국판사’가 ‘영국법’을 준거법으로 하는 계약 분쟁을, 당사자들의 주장에 근거해 ‘영국법’에 따라 판단하는 것과 유사하다.


한국법 사건을 많이 다뤄본 중재인이 아닌 이상, 외국인 국제중재인들은 한국과 한국법에 대해서는 일종의 백지상태에서 판단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이에 따라 변호사와 중재인 개개인의 역량이 사건의 승패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당사자들은 중재인을 선정할 때 한국의 문화적 배경을 잘 이해하는 인물을 선호하며, 한국 문화를 잘 아는 외국중재인들은 이른바 ‘단골’ 중재인이 된다(예: Benjamin Hughes).


소송절차에 나타난 고맥락/저맥락 문화

소송절차에서도 고맥락문화와 저맥락문화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특히 증거법과 소송절차법에서 차이가 극명한데 한 가지만 예를 들어 본다.

Trial by Jury or Laying Down the Law, 1840년 Sir Edwin Landseer 작품, 출처: wikipediaTrial by Jury or Laying Down the Law, 1840년 Sir Edwin Landseer 작품, 출처: wikipedia
법을 선포하다(Laying Down the Law)는 비효율성, 재판지연과 과도한 비용 문제로 악명 높았던 형평법 법원(Court of Chancery)에 대한 신랄한 풍자 회화다. 중심에 판사역할을 하는 흰색 푸들은 당시 판사들이 쓰던 법적 가발을 의도적으로 패러디했다. 그림 속의 다른 개들은 다양한 법조인들을 묘사하고 있다.

형평법 법원은 영국에서는 1873년, 미국에서는 1938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형평법 법원은 형평과 정의에 따라 판단하므로 판사의 재량이 컸고, 따라서 엄격한 증거법칙의 제한을 받지 않고 비교적 유연하게 증거를 채택할 수 있었다.


영미법상 성격증거(Character Evidence)


심리학에서는 성격을 주로 Personality라고 표현하는데, Character와의 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굳이 구분하자면, Character가 좀 더 학습되거나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측면이 강하다.


영미 커먼로에서 말하는 성격증거에서 ‘성격(Character)’의 의미에 대해서는 영국 형사법(Criminal Justice Act 2003)상 ‘부정적 성격증거(Bad Character Evidence)’이외에 달리 법률에서 정의하고 있지 않다.


성격을 법률적으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은 측면이 있고 학자들의 견해도 나뉘지만, 공통적으로 ‘행동상의 기질이나 성향’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성격에 대한 증명은 (1) 평판(reputation), (2) 의견(opinion), (3) 특정한 행위(specific instance of conduct)의 형태로 제출된다. 증인신문 과정에서 직접 물어볼 수도 있고(intrinsic), 다른 증거를 통해 이를 증명할 수도 있다(extrinsic).


우리 법과 달리 영미 커먼로에서는 민형사소송 전반에 있어서 성격증거(Character Evidence)의 제출이 원칙적으로 금지되고, 예외들은 매우 구체적이고 복잡하다.


사건과 무관한 당사자나 증인의 성격에 대한 증거들이 무분별하게 제출될 경우, 이는 판사나 배심원에게 부당한 예단(unfair prejudice)을 줄 수 있고, 당사자들이 핵심 쟁점에 대한 주장 및 증명은 뒤로 한 채 성격에 대한 증명에 치중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즉, 문제가 되는 지점에 초점을 맞추고 주의를 흩트리는 것들은 모두 분별하여 도려낸다.


한국 법원에서 성격증거


한국은 성격증거와 관련된 별도의 법률규정이 없다. 존재한다면 전과와 관련하여 선고/집행유예 제한, 누범/상습범 가중사유가 있을 뿐이다(형법 제35, 59, 61, 62, 64조 등과 각종 특별법).


물론 재판장은 소송관계인의 진술 또는 신문이 중복된 사항이거나 그 소송에 관계없는 사항인 때에는 소송관계인의 본질적 권리를 해하지 아니하는 한도에서 이를 제한할 수 있다(형사소송법 제299조). 또한 형사에는 위협적이거나 모욕적인 신문, 민사에서는 모욕하거나 명예를 해치는 내용의 신문은 금지된다. 의견을 묻거나 의논에 해당하는 신문, 증인이 직접 경험하지 아니한 사항에 해당하는 신문은 금지되나 ‘정당한 이유’가 있으면 허용된다(형사소송규칙 제74조 2항, 민사소송규칙 제95조 제2항). 마지막으로 증언의 증명력을 다투기 위하여 필요한 사항의 신문에 있어 증인의 명예를 해치는 내용의 신문을 하여서는 안된다(형사소송규칙 제77조). 이것들이 굳이 성격증거와 연관 지을 수 있는 전부다.


사실 위의 내용은 성격증거 제한이 아니다. 더욱이 위의 사항들 마저도 실제 소송에서는 상당 부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더구나 법관 평가 제도의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요즘 판사들은 대부분 친절하며 변호인들의 증거제출을 엄격하게 통제하지 않는다.


형사소송이나 개인 간의 민사소송 특히 부당해고를 다투는 노사 관계 소송이나 노동위원회 심판절차에서는 성격증거의 과도한 제출은 소송을 넘어 예상치 못한 비극을 초래하기도 한다.


부당해고구제 심판과 해고무효 소송


부당해고구제 심판이나 해고무효 소송에서 사용자인 회사 측 대리인들은 승소하기 위해 때로 근로자의 인격을 말살하는 수준으로 준비서면을 작성하고, 성격증거를 제출한다. 이에 대해서 법원은 보통 아무런 통제를 하지 않는다.


회사 측 대리인 입장에서는 근로자를 그렇게 만들어서 근로자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신뢰성을 떨어뜨려야 본인들의 소송에 유리하다고 판단한다. 회사가 증거를 독점하고 있으므로 근로자의 과거 자료를 찾아내 여러 가지 성격증거를 제출한다. 근로자의 동료들은 회사와의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회사의 편에서 증언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서면은 재판부, 특히 노동위원회 위원들에게 상당히 잘못된 예단을 형성할 수 있다. 특히 노동위원회는 부당해고구제 사건 등에서 심리 직후 판정을 내리고 판정문은 사후에 작성하기 때문에 예단이 개입될 여지가 법원보다 더 크다. 그래서 변호사들은 노동위원회 위원과 법관의 예단을 형성시키기 위해서 더 전략적으로 성격증거를 제출한다.


이런 서면을 받아보는 근로자는 억울함과 분노의 감정에 휩싸인다. 본인의 주장을 증명할 증거들은 회사에 있고, 동료들은 회사의 눈치를 봐서 근로자에게 등을 돌리며, 법원이나 노동위원회를 통한 증거자료 확보도 쉽지 않다.


재취업이 되면 다행이나 그렇지 않고 소송이 장기화되면 근로자는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상당한 정신적인 충격을 받게 된다. 간혹 억울함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이재학 PD사건). 성격증거에 대한 통제가 있으면 이런 현상을 조금은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성격증거를 배제하는 것이 필요한가?

Facta ejus cum ditis discrepant
(his actions do not square with his words)
사람의 말은 그의 행위와 일치하지 않는다 - 키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Rhetoric)


문화적 차이를 막론하고, 사람은 다른 사람의 진술의 신빙성, 타당성을 판단할 때 메시지보다는 메신저를 먼저 본다. 동일한 메시지라도 메신저의 신뢰성이 떨어지면 메시지의 설득력도 덩달아 약해진다. 어쩌면 많은 경우 일상생활에서 이렇게 판단을 하는 것이 잘 들어맞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에토스(ethos), 파토스(pathos), 로고스(logos) 삼위일체의 설득 이론을 주장했으며, 그중 가장 중요한 요소를 에토스로 보았다. 에토스는 화자의 신뢰도와 도덕적 자질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청중은 화자의 인격적 특성에 근거해 먼저 판단하므로,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의 논리는 설득력이 약화된다고 보았다.


로마 시대에 이르러 키케로는 이를 확장하여 로고스(논리적 호소), 파토스(감정적 호소), 에토스(화자 신뢰성)법정 변론의 핵심 요소로 체계화했다.


출처 신뢰성 이론(Source Credibility Theory)


화자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여부가 메시지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출처 신뢰성 이론’으로 호블랜드(Hovland) 등의 연구를 통해서 증명되었다.


광고의 경우 셀럽의 진정성, 조직의 위기 시 CEO의 신뢰도, 전문분야에서 전문가의 타이틀 그 자체가 메시지의 신뢰도를 높이는 요소로 작용한다. 형사법정에서는 증거가 부족한 사건에서 배심원이 피고인의 전과를 인지하면 유죄 확률이 2.8배나 증가한다.


이러한 편향은 법적 분쟁에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건 이해의 깊이를 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삼위일체적의 통합 활용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래서 영미 커먼로에서는 원칙적으로 성격증거를 불허하지만, 여러 가지 예외와 예외의 예외를 형성해 가며 단점을 보완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 민사소송에서는 당사자가 성격에 따라 행동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성격증거를 제출하는 것이 금지된다. 그러나 ‘성격’이 청구의 ‘본질(essential element)’을 이루는 경우에는 성격증거의 제출이 허용된다(앗, 에센스가 또 나왔다).


구체적인 사례로, 언론사가 허위의 사실을 보도하여 원고의 평판(reputation)에 손해를 끼친 명예훼손 소송을 가정해 보자(보도 내용: ‘원고가 사기를 쳤다’). 이때 언론사가 본인들의 보도가 사실이라 주장하는 것은 유효한 항변사유(Defense)다. 그리고 항변을 증명하기 위해 언론사가 원고의 과거 세금사기(tax fraud) 전과를 증거로 제출하여 원고의 '성격’을 증명하는 것은 허용된다. 원고의 성격이 바로 이 사건의 에센스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의 성격증거 실험


흥미롭게도 서울 소재 대학 심리학과에서 대학생 92명을 상대로 성격증거가 유죄 판결, 검사 측과 변호인 측의 주장 및 증거 판단에 미치는 영향을 실험했다. 실험 결과는 예상한 대로 명확하게 나타났다. 물론 신뢰도를 문제 삼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실험을 통해 이를 증명했다는 측면에서는 의의가 있다(참고 자료 고민조, 박주용의 글 참조).


실험 결과 피고인의 성격증거는 판단하는 사람의 최초 판단에 영향을 미쳤고, 최초판단은 이후 쟁점별로 제시되는 검사 측과 변호인 측의 주장을 판단하는 데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최초에 유죄판단을 한 사람은 무죄판단을 한 사람보다 쟁점별 유죄 확률을 더 높게 평가했다. 이 결과는 서로 대립되는 주장을 판단할 때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증거를 선택하고 판단하는 확증편향이 일어남을 보여준다.


그런데 혹시 우리와 비슷한 증거 규제를 하는 유럽 국가는 없을까?


유럽의 고맥락 국가 프랑스


유럽에서는 가장 고맥락 국가에 해당하는 프랑스에 대해 에드워드 홀은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저맥락 국가인 미국에서는 맥락을 이루는 배경 자료는 모두 배제되고 기정사실만을 증거로 인정하나, 프랑스 법정은 증인의 배후를 이루는 상황에 관해 가능한 많이 알기를 원하고, 사실, 풍문, 가십 등 모든 것이 청취된다.
법정은 그 재판에 연루된 인간들이 어떤 유형인가를 알고자 한다.

성격증거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탐색하겠다는 뜻인데, 확인해 본 결과 그의 설명이 여전히 타당했다. 프랑스는 직권주의적 소송구조를 취하고 있고, 실체적 진실발견을 형사소송의 기본이념으로 삼고 있어 한국보다 증거제출에 제약이 더 적었다.


성격증거에 대한 규정이 없다는 점은 우리나라와 동일한데, 프랑스는 이에 더해서 전문증거를 배제하는 전문법칙에 관한 규정도 없다. 따라서 사실상 법원은 진실 발견을 위해 모든 증거를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최소한 아래와 같은 전문증거 배제 원칙은 갖고 있다. 물론 형사소송절차만 해당되고, 민사소송절차에는 전문증거가 배제되지 않는다(영미는 민형사 모두 전문증거가 배제됨). 

제311조 내지 제316조에 규정한 것 이외에는 공판준비 또는 공판기일에서의 진술에 대신하여 진술을 기재한 서류나 공판준비 또는 공판기일 외에서의 타인의 진술을 내용으로 하는 진술은 이를 증거로 할 수 없다(형사소송법 제310조의 2).

정리 - 암묵적 편견(implicit bias)


이러한 차이점의 배경에는 고맥락 문화와 저맥락 문화가 깔려있다. 고맥락 국가의 법률법관이 성격증거까지 포함된 내용을 다 살펴보면 진실을 발견할 가능성을 더 높일 수 있다고 가정한다. 반면, 저맥락 국가의 법률법관이나 특히 배심원은 성격증거 때문에 진실을 왜곡하고, 잘못된 사실을 인정할 가능성을 더 높인다고 가정한다. 그래서 원칙적으로 성격증거를 금지하고 필요한 경우만 예외적으로 인정한다.


하지만 인지심리학, 행동과학의 이론과 실험은 (1) 사실을 판단하는 주체가 재판에서 제시된 증거를 토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고, (2) 추가되는 증거를 자신의 이야기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해석하며, (3) 증거가 없어 발생하는 공백은 자신의 경험과 인식의 틀에 따라 적극적으로 메운다는 것을 밝혔다(story model).


따라서 아무리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판사라도 (1) 자신이 살아오면서 쌓아온 고유한 경험과 지식에 의해 갖게 되는 편견과 (2) 재판에 임하면서 구체적 해당 사건에 대해 갖게 되는 예단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고 특정한 편견이 발생하면, 편향 확증(confirmation bias)에 의하여 이후에 제출되는 증거를 채택, 해석함에 있어서 자신의 예단에 부합하는 증거를 채택하고, 상반된 증거는 배척하려는 경향이 생긴다.


결국 성격증거는 아무리 개인적으로 배제하려고 노력해도 판사들의 추론에 오류를 발생시킬 수 있다(inferential error prejudice). 따라서 이런 추론 오류를 방지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인지심리학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무의식적 단계에서 의사결정에 영향을 받는 편향맹점(bias blind spot)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자신의 의사결정에 대한 객관성을 과신하는 경우 이러한 무의식적 요소에 의한 의사결정의 가능성을 무시하게 될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따라서 자신들은 이런 추론 오류는 범하지 않는다고 믿는 법조인들은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다. 


다만, 


동양인은 사람의 성격보다 상황의 힘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서양인은 동양인보다 사람의 성격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심리학 연구가 있다(예를 들어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와 리처드 니스벳의 연구논문(1998) 등). 리처드 니스벳의 '생각의 지도'에도 동일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동양인이 기본적 귀인오류를 덜 범한다는 주장이다. 


기본적 귀인오류(fundamental attribution error)란 사람들이 타인의 행동의 원인을 판단할 때 상황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하고 개인 성향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성으로 사회심리학자 Lee Ross가 제안한 개념이다. 대응 편향(correspondence bias)이라고도 한다. 


만약 이 주장이 타당하다면 한국인 판사들은 성격증거들이 제출되어도 서양인에 비해서는 덜 영향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문화적 비교에 따른 것일 뿐이고, 성격증거가 배제되지 않은 한국 소송에서 판사들은 당사자, 증인의 성격에 대한 암묵적인 편견을 가질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위 연구에 방법론적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주장도 있고, 다른 연구에서는 아시아인과 미국인에게 동일한 수준의 대응 편향이 나타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Douglas S. Krull 1999). 



표시의 아르케


법률행위는 의사표시로, 의사표시는 표시로 응축되었고, 그 표시의 아르케를 다시 추출하려다 보니 언어의 특징과 문화의 차이점, 그리고 언어를 기반으로 한 문화가 중재와 소송에 미치는 영향을 다소 길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여기서 다시 한번 '표시'를 정제하면 무엇이 남을까? 갈 때까지 한번 가보자.


이제 메인 디쉬를 마쳤으니, 주석(6화)으로 입가심하고, 달콤 쌉싸름한 디저트(7화)를 먹으러 가자. 원래 디저트가 가장 맛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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