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번째 : 니나 잘해라

ubc울산방송 유쾌한데이트 DJ 전선민

by 김밀


- 선배, (손글씨) 하나 써줘.

- 니한테 할 말 딱 하나 있다. 니나 잘해라.


아침이면 본다. 지역에서는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광고를 찍은, 그래서 ‘울산 연예인’이라고 불리는 25년차 디제이이지만 나에겐 ‘저 인간 왜 저래’ 할 때가 많은 선배이다. 그는 나이 차이가 꽤 나는 후배들과의 자리에서 늘 대화의 줄기를 본인 쪽으로 가져가고, (이건 진짜 한번 이야기를 해야지 하고 있다.) 방송 중에 종종 커피를 배달시키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니가 웬일이고’ 하며 나를 돈 안 쓰는 찌질한 사람으로 만들어서 게스트들 앞에서 개망신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버르장머리 없이 대들기도 하고, 정돈되지 않는 말을 내뱉을 때도 있고, 후배들에게 사정없이 뒷담화를 해대기도 한다. 그런데 그에겐 늘 애틋한 마음이 있다. 한 후배의 말처럼 ‘친정오빠’ 같은 느낌. ‘저 인간을’이라고 했다가, 좋아서 잘해주고 싶기도 했다가, 또 어느 날은 별 감정 없이 흘러가기도 한다.

그날도 여느 아침과 같았다. 늘 그가 회사에 먼저 와 있는데 방송 전에 창가에 걸터앉아서 도시락을 꺼내 먹고 있었다. 전날은 한일 축구 경기가 있었다.


- 선배. 어제 몇 대 몇이었어?- 축구 안 봤나? 너거 아저씨는 한일전도 안 보나?


평소 같았으면 분명 ‘우리 어제 다 빨리 잤다’ 라고 뭉갰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늘 선배에게 언젠가는 말해야지 했다가 또 넣어뒀다가, 다시 목 아래까지 끄집어냈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는데, 그날은 말해야지 버튼이 커졌다. 이혼이라는 말을 입에서 굴리기 싫어서 택한 단어가 한부모 가정이었다.


- 선배. 나 진즉에 얘기했어야 했는데, 나 한부모 가정이야. 결혼하고 같이 산 건 일 년도 채 안되더라고. 내가 부족해서 부족한 사람을 만났어.아이는 결혼하고 한 달만에 생겼고. 그랬는데 우리 태엽이가 곧 대학생이 되네.


그러고 보니 매일 보는 그에게 수십 년을 꽁꽁 싸매고 있었다. 지금은 알콩달콩 신혼생활을 즐기는 후배들에게 ‘보기 좋다, 나는 왜 좋은 남자가 안 보였을까’ 라는 말도 기꺼이 나올 정도가 됐지만, 꽤 오랫동안 담배 겉면에 있는 흉측한 사진처럼 마음이 곪아 있었다.


- 남편 이야기를 워낙 안 해서 사이가 안 좋나, 별거 하나, 이렇게 생각은 했지. 오래됐네. 그게 뭐라고. 이혼이 흠이가.

- 나한텐 흠이더라고.


그리고 선배 니는 입이 싸서 말 못 했다라고는 하지 못했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앞에서는 ‘나의 진짜 모습’이 나와서 좋다. 운영하고 있는 논술학원 학부모들에게 보이는 정제된 모습이나 게스트들 앞에서 필터링된 모습을 걷어내고, 깝치고 나대는 내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차갑지 않은 욕을 먹는 게 좋다.

그가 좋아하는 라디오를 오래오래 했으면 좋겠고, 그의 가족들이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와 나는 같은 부류. 해파리. 머릿속이 훤히 보이는 해파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솔직함이다. 물론 그는 되지도 않은 말이라며 이 말을 하겠지만. 꺼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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