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기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은 서늘하면서도 끌린다. 넓은 호텔 로비에 서로 관계없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무심하게 배치되어 있거나, 호텔 객실에 혼자 앉아있는 여인의 그림을 보면 작가는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생각하게 된다. 창밖에서 안을 들여다본 듯한 그림들은 작가가 실제로 본 장면일까 아니면 상상한 장면일까 궁금해진다.
오래전 패키지로 유럽여행을 한 적이 있다. 대형버스를 타고 밤늦은 시간에 파리 시내로 진입하는데, 불 켜진 도로변의 집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버스 안에서 올려다보는 이층 건물 내부는 노란색 백열등 때문인지 따뜻해 보이고, 식탁보가 덮인 테이블이며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 모습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집안사람들은 커튼으로 가릴 생각도 않고, 누가 본다는 걸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어서 혹시 의도된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했다. 관광 수입을 위한 정책적 조치가 있는 것은 아닌지 또는 파리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당당한 건지 여러 가지 추측을 했었다. 에드워드 호퍼가 그린 그런 장면들이었다.
지중해의 뜨거운 태양을 가리기 위해 창문에 나무 덧문을 만들어 열을 차단한 모습을 보고 우리도 도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올해 이탈리아 여행에서는 성당의 고해성소가 이탈리아 가옥의 창문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창문을 통해 소통하고 있었다.
나폴리에서 나흘 머무는 동안 스파카 나폴리 시장 골목을 들락거렸다. 숙소가 거기 있었으니까. 수다를 떨며 귀가하는 길에 불쑥 내밀어진 이웃집 여인과의 조우는 우리에게 추억을 만들어주었다. 놀란 나의 손을 부여잡고 미안함을 표현하던 그녀는 머리를 곱게 단장하고 나서야 우리들과의 기념 촬영에 응했다. 사진 속에서 예쁘게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똑같나 보다.
시칠리아 어느 골목길에서도 창밖의 친구와 대화를 나누던 할아버지 역시 기꺼이 사진 촬영을 허락해 주었다. 그들의 창은 길게 반으로 나뉘어, 몸의 상반신을 드러내고 바깥과 소통하다가 내키면 하단의 나머지 반을 열고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어있다.
내가 알던 고해성소는 검은 천이든 문이든 굳게 닫혀있어서 신부님은 물론이고 고해하는 신자의 모습도 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나폴리나 로마의 몇몇 교회에서는 고해성소가 오픈되어 있어서 나는 신기하고 보기 좋았다. 신부님은 안쪽에, 그리고 신자는 바깥에서 팔꿈치를 걸친 채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창문을 통해 이웃과 대화하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모습과 흡사하였다.
우리나라의 청년들이 독립하면서 자신만의 방을 구할 때 최소한의 조건으로 삼는 것 중 하나가 창문이 있는 화장실이다. 물론 방에도 창문이 필요하다. 창문이 없는 방을 먹방이라고 한다. 먹빛은 먹처럼 검은빛이니 창문이 없는 방은 조명이 있다고 하여도 답답하기가 칠흑 같을 것이다. 그런데 넓은 통창을 만들고도 그 창을 블라인드나 커튼으로 가려놓는 경우가 많다. 지나가는 사람이 들여다보거나 누군가에게 관찰당할 것을 염려한 때문이다.
“장막을 걷어라. 너의 작은 눈으로 이 세상을 떠보자. 창문을 열어라, 춤추는 산들바람을 한번 또 느껴보자”
이 노래의 제목은 ‘행복의 나라로’다.
2025.11.17. 감기가 거의 나을 즈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