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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조루에서

여행일기

by 배심온

'타인능해(他人能解) : 다른 사람도 능히 열고 가져갈 수 있다.’

운조루에 들어가기 전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타인능해’라고 쓰여있는 뒤주였다. 안동 하회마을의 류씨 가옥 앞에서 본 적이 있는 뒤주인데 크기가 거대하다. 반가운 마음에 사진을 찍으려니 그 앞 전동 의자에 앉아계시던 할머니가


“이건 가짜야,

유물전시관에 진짜가 있으니 가봐”


하신다. 유물전시관을 들를 여유는 없고, 우선 사진을 제대로 찍고 싶은데, 할머니가 방해가 된다. 비켜달라고 할 수도 없고 해서


“할머니, 사진을 찍어도 될까요?”


라고 여쭸더니 고개를 저으신다. 할머니는 이 주인으로 보인다. 1인당 천 원씩 입장료를 받고 계셨다.


이름만 듣던 운조루는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담장처럼 펼쳐져있는 행랑채로 집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었다. 마당을 들어서면서 시선을 막는 작은 누마루가 있으니 두 칸짜리 작은 사랑채다. 정면으로 보이는 큰 사랑채는 작은 사랑채와 기역자로 연결되며 그 연결 지점에 부엌이 마련되어 있다. 이 부엌은 안채로 연결되는 통로이기도 한데 다른 한옥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공간이다. 운조루의 굴뚝은 유난히 낮다. 지붕 위로 솟아있지 않고 허리춤의 높이인데 심지어는 아궁이보다 낮게 위치한 것도 있다. 타인능해처럼 굶주리는 마을 사람들을 배려한 배치라고 한다. 나무 뒤주에는 쌀이 두 가마니 반이 들어가 1년이면 36 가마니를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었다고 하니, 운조루의 명당 운이 마을 전체에 퍼진 셈이다. 운조루는 금환락지(金環樂地), 금가락지가 땅에 떨어져 있는 형국이라 부귀영화를 누릴 남한 3대 명당 중 하나로 손꼽힌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되었던 토지면이 이곳이다. 전남 구례군 토지면 운조루 길 59.


안채는 장독대가 놓여있는 마당을 중심으로 미음자 구조를 이루며 안채 만의 행랑채가 별도로 있다. 250년 된 한옥은 낡았고, 망가진 문이나 창틀 여기저기가 보수되어 있다. 다양하게 덧대어있는 나무들은 지난 세월만큼 각자의 색깔들을 드러내니 아직도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안심이 된다. 보기 드물게 안채의 부엌 이층에 공간이 있고 커다란 창문이 열려있다. 외출이 자유롭지 못했던 여인들을 위한 공간이란다. 안채에 머무는 여인들이 마당에서 벌어지는 잔치나 행사를 지켜볼 수 있게 배려한 곳이다. 그곳에서는 멀리 지리산 자락의 벌판도 훤히 내려다보인다고 한다. 운조루에는 이것저것 융통성 있는 공간이 많다. 작은 사랑채에서 안채로 연결되는 통로는 경사로를 만들어 가마나 노인들이 이동하기 수월하게 만들어 놓았다. 작은 사랑채에도 큰 사랑채에도 각각 누마루가 딸려있어서 여유와 운치를 즐길 수 있다.


큰 사랑채에 딸린 누마루 이름이 운조루인데, 이름처럼 구름 속에 새가 안겨있는 듯한 포근함이 느껴진다. 그곳에는 누구든 원하는 사람들에게 차를 대접하려고 대기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분은 운조루 대문을 지키던 할머니의 차남으로 운조루의 차종손이다. 운조루는 좌탁을 중심으로 네댓 명이 앉으면 족할 정도로 아담한 크기이다. 운조루의 처마는 지리산 자락과 나란한 선을 그리고, 뒤쪽으로는 사당으로 가는 마당 건너 이웃집 담벼락이 보인다.


1776년(영조 52년)에 시작하여 7년에 걸쳐서 지어진 한옥이니 그 정성과 정교함이 오죽할까 싶다. 그리고 실용적인 변화도 마다하지 않았다. 여닫이 문은 필요에 따라 처마 위로 들어 올려지니 한여름의 더위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다. 지리산 자락의 넓은 벌판을 그대로 실내로 가져오는 장치이기도 하다. 운조루는 만만치 않은 규모이지만 위세를 부리지 않고 짜임새 있는 구조에, 집안에 사는 사람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을 함께 배려한 따뜻하고 아름다운 집이었다.


타인능해, 능히 나무 뒤주를 여는 이웃들은 꼴이나 땔감을 대문 앞에 놓아두는 것으로 고마움을 표했다고 한다.


운조루 앞을 흐르는 수로 주변 양지바른 곳에 직접 농사지은 곡식을 팔고 있는 아주머니와 할머니 네 분이 앉아계신다. 가장 연로하신 할머니의 팥과 들팥, 그리고 말린 밤을 샀다. 저쪽 끝에 계신 할머니의 항의가 있다. 그 밤은 썩었다. 좋은 내 밤을 사라. 잠깐 갈등이 생긴다. 가운데 계신 젊은 아주머니가 설명하신다. 네 명의 물건을 골고루 공평하게 사라는 이야기라고. 괜한 분란을 만드는 것 같아 빠르게 자리를 뜬다. 나에게 곡식을 판 할머니는 바로 전동차를 운전하여 귀가하신다.


2010년 2월 3일 방영된 운조루 영상에는 종갓집을 지키고 있는 종부와 종손, 그리고 우리에게 차를 대접했던 차종손의 모습이 있었다. 고택을 지키기 위해 옛 생활방식을 고수해야 하고, 17번이나 도난을 당하고 도둑들의 공격으로 몸을 다친 종손의 모습이 현실로 다가왔다. 영상 속의 종부는 여든이 다 되었다지만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단정하게 쪽진 머리에서 여전한 기품이 보였다. 우리에게 가짜임을 공지하고 진짜가 있는 곳을 알려주셨던 그분이시다.


그 후로 15년의 시간이 또 지나간 것이다.


2025. 11. 21~ 23. 구례 하동을 여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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