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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나비존'을 보고 나서

여행일기

by 배심온

나비존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딸은 장자의 꿈 이야기를 한다.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훨훨 자유롭게 노닐다가 잠에서 깨고 나니, 내가 나비였는지, 나비가 내가 되어 날아다녔는지 모호하다는 호접몽 말이다. 이탈리아인들이 장자를 알기 어려우니 '나비존:THE BUTTERFLY DREAM'으로 변형하였다는 설명이다.


안애순 현대무용단이 피렌체 무용단과 협업으로, 창덕궁 낙선재에서 시월의 마지막날과 그 전날, 2회 공연을 하였다.


한 시간 남짓한 공연을 두 번 하기까지 그 여정은 길고도 험난해 보였다. 정부의 문화지원사업으로 채택되기 위한 작업은 이미 지난해부터 시작되었다. 프로듀서를 맡은 딸아이는 올 6월 이탈리아 출장을 통해 공연 계획을 확정 짓고,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기 위한 계획서를 제출하고, 장소 사용에 대한 허락을 받는 절차에 돌입하였다. 10여 회에 이르는 계획서의 수정과 보완을 통해 겨우 장소가 확정되었다.


한 달도 넘게 한국에 머무는 이탈리아 안무가들의 숙식을 살피고, 무용수들의 연습 현장을 지키며 공연 준비를 하나하나씩 완성해 간다.


두 나라 안무가의 협업이 간단치 않을게 예상되지만, 실제는 예상 이상으로 어려워 보였다. 서로 다른 생각을 통역자에게 피력하니, 이탈리아 관계자의 불만은 고스란히 딸아이에게 향하고 있었다.


10월 들어 가을 날씨 답지 않게 비가 오락가락하면서 걱정거리는 더 늘어났다. 창덕궁 낙선재 마당에서 이루어지는 공연이라 비가 오면 대책이 없다.


공연 전날까지도 이런저런 의견차이로 과연 공연이 가능할까 불안해했다.


다행히도 10월 30일은 청명하게 날이 개였다. 31일도 비소식 없이 공연을 도왔다.


사각형의 낙선재 마당 어디에서 무용수들이 등장할지 알 수가 없다. 흙바닥에서 어떻게 춤을 출지도 가늠이 안된다. 한옥 마당에서 현대무용이 어떻게 녹아들지 예측불가다.


반년 넘게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준비한 완성작품이 드디어 눈앞에 전개된다.


무용수들은 신발을 신었고, 그들의 춤판이 될 커다란 비닐장판을 메고 나와 마당에 깐다. 이것으로 춤이 시작된다.


춤은 시작부터 긴장과 불안을 가져온다. 다섯 명의 무용수는 무리를 지어 이동하지만 불협하는 한 명은 중얼거리는 말로 존재를 부각한다. 불안하다.


흰색과 노란색 양면의 은박지는 두 무용수의 속마음이면서 꿈속이자 동굴이자 변태를 위한 고치다.


사각의 장판을 깔고 거둘 때 나는 거칠고 투박한 소리는 세상을 바꾸는 듯 비장하다. 대조적으로 예민하게 바스락거리는 은박지 소리는 온몸을 간질거리며 긴장감을 만든다. 조금의 움직임도 허락하지 않는다.


무용수들의 단련된 근육은 하나의 오차도 없이 의미를 전달하고자 한다.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노련하다. 관절을 꺾는 듯한 몸짓과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고립과 단절을 의미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현대무용이라고 하니 한 명의 관람자로서 이런저런 해석을 해볼 뿐이다.


비웠다 채워졌다 공간에 흐르는 소리들은 숨을 죽이게 한다. 가끔 낙선재 마당을 지나가는 새소리도 음향효과로 섞인다. 가을 하늘을 보며 창덕궁 마당에서 벌어지는 춤판이라 가능한 일이다.


어느 순간 낙선재의 누마루에 노란색이 어른거린다. 노란색 활옷을 입은 여인이 언제부터인가 나타나 둥실둥실 느린 동작으로 춤을 추다가 사라졌다가 마당으로 내려온다. 노란 활옷을 마당에 벗어놓고 하얀 속옷 차림으로 속절없이 사라져 버린다.


공연은 막바지에 이른 듯하다.


안애순 단장과 이탈리아 안무가 두 명, 그리고 다섯 무용수와 노란 활옷의 여인이 관객들에게 인사하는 것으로 공연은 마무리된다.


박수갈채가 쏟아지고 그동안의 노고에 서로를 위로하고 칭찬하는 광경이 펼쳐진다.

다섯 시가 지난 시간, 해가 저물면서 기온이 떨어지니 얇게 입고 있는 딸이 걱정이다.


화장실을 가게 될까 봐 준비해 간 따뜻한 차도 마다한 딸아이는 공연을 마치고서야 화장실을 찾는다. 식사는커녕 물도 못 마신 아이의 입술은 말라서 갈라져있다.


큰 문제없이 무사히 마쳤다.

장하다고, 수고했다고, 무척 좋았다고 칭찬을 하고는 서둘러 현장을 빠져나온다. 뒷마무리가 남아있을 딸아이에게 그게 나을듯해서다.


가을날, 창덕궁 낙선재 마당에서의 나비존은 참신했다. 땅바닥에서의 몸부림이 어느새 누마루의 날갯짓으로 날다가 다시 마당으로 내려와 탈피를 한다.


'나비존'은 변화와 경계를 허무는 수용의 구역이었다.

딸아이에게 변화와 자유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


2025. 11.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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