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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 풍경

여행일기

by 배심온

이제 혼자 만의 여행을 합니다.

일정은 무기한이지요.


세 달간의 긴 여행을 마치고 바로 친정 엄마를 뵈러 강릉에 다녀옵니다. 명퇴했다는 사실도, 해외여행을 떠났다는 사실도 말하지 않은 채 훌쩍 떠났으니 얼른 찾아뵙고 이실직고를 해야 합니다.

엄마한테 걱정 끼칠까 봐 말을 안 했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엄마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그랬던 겁니다. 나는 왜 이렇게 잔소리가 듣기 싫을까요? 잔소리 듣고 싶은 사람은 없겠지만 부모님의 걱정을 잔소리로 취급하는 게 문제겠지요. 누군가 잔소리를 '엄마가 하는 말' 또는 '옳지만 듣기 싫은 소리'로 정의하더군요. 우리 딸들도 저와 같을 겁니다. 그러니 딸들에게 잔소리를 하지 말아야겠어요.


엄마는 90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귀가 안 들려 노노 돌봄 일을 못하게 되었다고 자존심 상해하셨어요. 혼자 집에 우두커니 앉아있으면 뭐 하나 싶다 가고, 저 연세에도 일을 하려고 하는 그 마음과 그 인생에 연민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엄마가 머리를 빗고, 옷을 챙겨 입으시고는 환경정화사업에 나가실 채비를 하시는 걸 보며, 나도 같이 친정 집을 나섭니다.


노인들이 모이는 곳까지 모셔드리고 나는 강릉역으로 향합니다. 가만히 보면 거리 곳곳에 조끼를 입은 어르신들을 많이 볼 수 있고, 별로 하는 일 없이 그냥 왔다 갔다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습니다. 초등학교 친구는 그게 바로 이 사업의 취지라고 하네요.

집에 계시면 여기저기 더 아프고 외롭고 쓸쓸하니 밖으로 나오시게 하고, 그들에게 지불하는 비용은 그들이 아파서 쓰게 되는 병원비보다 훨씬 적게 들 거라는 논리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복지가 얼마나 잘 되어있는지 놀랍다고 말하더군요.


오호, 그거 말이 되네. 연로하신 엄마가 일 나가신다고 만류하거나 속상해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런 깊은 뜻을 가지고 사회복지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참으로 칭찬할 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딸이 왔다고 결석할 수는 없다는 엄마 때문에 예약한 기차 시간보다 서너 시간은 일찍 기차역에 도착하니, 무엇을 하나 궁리를 하게 됩니다. 나는 그동안 목욕을 하기로 하고, 근처 목욕탕을 검색합니다. 역 주변의 24시간 사우나 말고, 강릉 주민들이 갈 만한 장소를 선택합니다.

강릉역과 거리가 꽤 되는 곳으로, 찾아간 목욕탕은 누수 공사를 위해 당일 12시 30분까지만 운영을 한다는 공지가 붙어있었고, 내부는 어느 시골에서도 볼 수 없는 작은 목욕탕이었습니다.


바닥 한쪽에는 목욕하러 오는 손님들에게 팔 요량으로 갖다 놓은 참나물 다발이 놓여있고, 거울 앞 선반에는 커다란 텀블러가 수북이 쌓여있고, 주인을 표시하는 이름들이 적혀 있었어요. 아마도 목욕하면서 냉커피니, 감식초니 그런 것들을 마시며 갈증을 해소하나 봅니다. 그런데 손님들 전용 텀블러가 있다는 거겠지요?


욕실 내부는 열명 정도 되는 아줌마 할머니들로 꽉 차있고, 욕조는 너덧 명이 들어가면 그만일 만큼 작았어요. 냉탕 욕조와 작은 사우나실도 있긴 하네요. 나는 예정치 않은 목욕탕 나들이라서 때밀이 타월도 새로 사서 들어갔는데, 비누도 제공되지 않는군요. 옆의 아주머니가 때 미는 분한테 빌려달라고 하면 된답니다. 그리고 샴푸와 린스도 기꺼이 빌려주셨어요. 그러고 보니 손님들은 각자 커다란 목욕 바구니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 속에는 온갖 목욕용품이 가득했고, 이 바구니들은 목욕탕에 두고 다니는 모양이었습니다.


누군가 욕실에 들어오면서 큰소리로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연예인이 온 줄 알았다며 또 농담을 던지며 반가워합니다. 손님들은 모두가 아는 사이인 듯하고, 다들 이야기 꽃을 피우며 목욕을 하면서 놀고 있었어요. 나는 옳거니 제대로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들의 이야기가 재미있고, 진한 강릉 사투리가 우습기만 합니다. 부탁도 안 했는데 때밀이 아줌마는 냅다 나의 등을 밀어주시네요. 목욕탕의 아줌마 할머니들은 모두들 곱고 잘 생겼어요. 내가 주문진 촌사람이라 강릉 도시 사람들이 달라 보이나 싶기도 하고, 여기가 강릉에서 살만한 여인들의 아지트인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그들의 진한 사투리가 삐져나오는 나의 웃음을 막지 못했네요.


"왜서 강릉 사투리가 우습나?"


옆의 아주머니에게 나의 웃음을 들켜버렸습니다.


"새댁은 어디서 왔는가?"

"아, 서울에서요. 친정이 주문진이에요."


나는 60이 넘은 새댁이 됩니다.


아주머니들은 매일 한두 시간씩 목욕탕에 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후에 있을 공사가 오늘 안에 끝나는지, 내일 여기 올 수 있을지 설왕설래하시네요. 하루라도 안 오면 못 산다고 하니 공사는 오늘 안으로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도 오후에 왔었다면 헛걸음을 할 뻔했던 거고요.


목욕탕을 나오면서 주변을 살펴보니 여기는 강릉여고 뒤편, 그리고 철거 예정인 동부시장 앞에 위치해 있더군요. 아무튼 저는 원했던 사람 사는 구경을 재미나게 했습니다.


나의 혼자 만의 여행은 앞으로 어디로 향할지 나도 모르겠네요.


2025.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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