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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무는 왜 열무일까?

여행일기

by 배심온

바디랭귀지가 있다.

몸짓이라고도 한다.

랭귀지가 기본이다.

필담도 있다.

수화도 있고.

언어에는 온도도 있다.


침묵도 랭귀지 어디쯤에 앉힐 수 있을까?


의사표현으로써의 침묵을 '침묵의 대화'로 명명하고 나니 이것도 의사를 전달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언어는 아니지만.

그래서 온도도 없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따뜻하지도 않다. 안개 속이다.

오리무중이니 추측을 해야 하고, 오해를 쌓고, 화를 돋우고, 거리를 만든다.


밥상에서 먹기 싫은 음식을 쓱 밀어놓는 건 바디랭귀지인가 침묵인가? 식탁에 앉아서 아무 말없이 밥을 먹는 건? 맛이 없다고 식사를 거부하는 건?

이건 무례이며 시위이자 도발이다.


바디랭귀지가 몸을 움직여 의사를 전달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인데 반해, 침묵은 의도적으로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먹기 싫은 음식을 쓱 밀어내는 것은 바디랭귀지가 맞다. 준비된 식사에 대해 말없이 먹기만 하는 건 침묵이다. 물론 먹을 게 없다며 밥을 안 먹는 것도 바디랭귀지.


침묵은 참으로 고약하다.


묻는 말에 대답을 안 하는 건 무시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가는 건 묵인이자 용인이다.

의사표시 없이 어떤 결정에 따르는 것은 동조다.

옳지 않은 일을 내버려 두는 것은 방조이자 방관이다.


단테 알리기리에리는 그의 작품 '신곡'에서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방관자를 위해 남겨두었다."라고 했다.


식탁 위의 침묵은 소화를 돕지 못한다. 소통의 부재일 테니.


음식 솜씨가 없거나 개선의 여지가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 외에,

요구하면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오만한 자.

부엌에 들어가면 그거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겁쟁이.

스스로 식사준비를 못하는 권위주의자.

예의를 모르는 무례한 자.

지극히 무신경한 자.

가학을 즐기는 자.


왜 갑자기 열무가 떠오르는 걸까?

혹시 열무가 솟구치는 열을 내려줄지도 모른다는 착각 때문일까?

이런 게 언어의 온도는 아닐 텐데, 나의 생각은 중구난방으로 가지를 뻗어나간다.

쬐그만한 뿌리를 달고, 줄기에 까슬까슬 돌기를 갖고 가지런히 묶여있는 열무단을 보면, 여름이 왔다는 걸 안다.

국숫집에서도 열무국수는 계절메뉴라서 6월이나 되어야 판매를 시작한다.

열무는 여름에만 나니까. 열무국수뿐만 아니라, 보리밥에 계란 프라이 하나 넣어 비벼 먹는 열무비빔밥은 없어진 입맛을 찾아준다.


열무는 어떻게 열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을까?

열무는 '여린 무', 또는 '솎아낸 어린 무'에서 온 말인데, 요즈음 우리가 먹는 열무는 개량종이다. 열무에서 무를 얻을 수 없고, 열무로 무청을 대신하기도 한다.

열무김치뿐만 아니라 나물, 샐러드, 된장국으로도 먹는다. 아주 어리고 여린 것은 피자 토핑으로도 가능하지 않을까? 루꼴라도 올라가고 시금치도 올라가는데, 열무라고 안될 건 없지 않나. 여름 특별 메뉴로.


열무김치를 잘 담그면 요리를 좀 하는 사람으로 인정할 수 있다. 풀을 쑤거나 삶은 감자를 으깨어 넣고, 풋내 나지읺게 시원하고 알싸한 맛을 살려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성공적으로 열무김치를 완성했어도 그 맛을 즐길 수 있는 기간은 일주일 정도에 불과하다. 금방 쉬어버리니 맛있을 때 얼른얼른 나누어 먹어야 한다.


그 귀한 열무김치를 아직까지도 장만해 주시는 형님께 감사할 뿐이다.


나에게 열무김치를 맛있게 담그는 일은 불가능하다. 양파김치는 어떨까? 왠지 양파가 열무보다는 덜 까다로울 것 같아 용기를 내어본다. 작은 양파를 골라 다듬고 양념을 만들어 바른다. 제발 맛있게 해달라고 기원하며 통에 담아 냉장고에 넣는다. 내일이면 먹을 수 있겠지.


끼 식사를 준비하는 일은 신성한 일이다. 요즘 같은 한여름에는 더욱 그렇다.


2025. 7. 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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