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8개월 만에 이직을 한 나는 입사 이주 만에 퇴사 포부를 밝혔다. 지나친 야근과 추구했던 뱡향성과 달랐던 프로젝트와 연봉. 이주 만에 회사에 대한 빠른 판단을 내리곤 나와 맞지 않는 곳이라 여겨 타 회사의 면접을 보고 합격한 후, 대표님과 긴 상담을 하게 되었다.
근 4년을 다녔던 회사에서 철야를 하며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직 후, 야근을 하게 되니 성에 차지 않은 연봉 때문이었을까. 야근하는 그 시간을 도저히 참고 견딜 수가 없었다. 점심과 저녁을 먹고 내내 앉아 있으니 몸은 점점 붓기 시작했고, 소화도 잘 되지 않을뿐더러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것과 경력직에 대한 부담감까지 찾아오니 하루하루가 내겐 고단했다.
몇 년 전 지원했던 회사였지만 떨어졌었고, 다시 지원해서 붙은 회사였다. 디자인적으로 배울 점이 많고 유망한 회사에 입사를 하게 되어 나만 열심히 임하면 성장할 수 있는 곳임에 분명했지만 반복되는 야근과 작은 연봉에 내 마음은 어렵기만 했다. 물론 배움과 성장도 중요하지만, 지금의 나이는 꽤나 중요한 시점으로 '이직을 하면서 내 몸값을 불리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사로 잡혔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이전의 내 모습과는 전혀 다른 선택을 내렸다. 언제나 워라밸, 연봉보다 감도 높은 디자인과 성취감을 중시했던 내가 이번엔 디자인을 포기하고 더 높은 직급과 연봉을 주는 곳을 택했다. 디자인 직종에 속한 사람들은 깊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감도 높은 디자인 회사를 택하면 야근과 지나치게 작은 연봉, 워라밸과 복지를 택하면 비교적 감도 있는 디자인을 하는 곳이 아닌 회사. 대부분 이렇게 갈림 길이 나뉜다.
유명한 디자인 회사를 내 손으로 놓아버리고 디자인에 대한 욕심을 뒤로한 나답지 않은 선택임을 알았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내 모든 열정을 이전 회사에서 다 소모하고 온 것인지 더 이상 수지타산에 맞지 않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타이밍이 참 우습게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옮기기로 했던 회사에서 갑자기 직원 채용에 변동이 생겨 이번에는 함께 일을 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연락이 왔다. 당장 퇴사가 이주일도 채 남지 않았는데 이게 무슨 말일까. 이미 퇴사하기로 한 회사에서는 더 일해볼 생각이 없냐며, 다시 한번 나에게 제안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거절을 했는데 대표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번복해야 하나 싶었다. 직원들도 대표님은 오히려 좋아하실 거라며, 잘 설득해 보라고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정말 그냥 이곳을 다녀야 할까 마음이 심란했지만 수없는 고민 끝에 나는 결국 떠나기로 결심했다. 내게 가장 중요했던 가치관이 디자인에서 워라밸과 연봉으로 바뀌어 버린 것을 깨달은 이상, 이곳에서는 앞으로도 내가 견디기 힘들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희망했던 프로젝트의 성격이 달랐으니 사실상, 옮기는 것이 맞았다.
그렇게 나는 졸지에 다시 백수가 되었고, 백수가 된 일주일 만에 새로운 회사를 면접보고 다시 이직하게 되었다. 집에서 10분 거리 회사로, 야근이 없다는 후기를 보고 지원한 곳이었다. 감사하게도 연봉도 내가 원하는 최대 연봉으로 맞춰 주겠다고 하셨다. 그 대가로 내가 포기한 것은 디자인이었는데 그 뜻은 디자이너로서 자존심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였다. 첫 직장에서의 동료는 내게 가오 상하니까 디자인을 포기하지 말라고 이야기해 주었고 사실 나도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내가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란 무엇일까. 반대로 객관적으로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결국 내가 원하는 행복은 어떤 것일까. 머리가 아파왔다.
그냥 여기서 공간 디자인 일을 접어 버릴까도 생각했었다. 결국 수많은 고민 끝에 내가 속한 분야에서 최고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지식이 있을 때 그만두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었던 그 다짐을 지금 시점에서 놓아버리는 것은 나를 평생 패배 의식 속에서 살게 할 것이라는 걸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현실과 타협하고 워라밸과 연봉을 챙길 수 있는 두 번째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고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만족하며 회사를 다니게 되었다. 6시에 칼 퇴근하고 집에 오면 6시 10분. 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책을 보고, 영어 공부를 하고, 운동도 마음껏 할 수 있고 미래에 대한 계획과 부수익 파이프 라인까지 고민하며 자기 계발을 쌓아갈 수 있는 황금 저녁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기만 했다.
비교적 낮은 업무 강도와 긴장감에 이제야 살 것 같았다. 행복과 자유를 누리게 되었고 회사에서 배움도 아예 없진 않았기에 오히려 자기 계발을 하며 나를 성장시키고, 목돈을 모아가기에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이라 생각했기에 감도 높은 디자인을 포기한 것에 후회가 없었다. 어차피 마음 한 켠, 이 직업은 평생 직업이 아니라 단정 짓고 있었기에 마음이 더 편했다.
그런데 웬 걸. 행복을 누린 지 얼마 되지 않은 한 달 후에 계약 연장이 어렵다는 통보를 받았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 권고사직을 하고 있는 추세였던 것이다. 결국 나는 또다시 백수가 되었다. 마음이 착잡했다. 아, 역시 디자인을 포기하면 안 되는 걸까. 나는 다시 굴러야 하는 걸까. 마치 디자인을 버린 그 길은 나와 맞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과정 같았다.
결국 한 달 만에 또 다른 회사를 입사하게 되었다. 이번엔 정말, 제대로 불사 질러 보자는 마지막 용기를 내어 야근이고 뭐고 디자인적으로 유망한 회사에 다시 여럿 지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잘해보자는 다짐을 견고히 세우고야 말았다.
그래서 6개월 간, 세 번의 이직 끝에 과연 이번엔 정말 회사를 잘 다니게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