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나이 일흔에 풀어놓는 소소한 이야기(제36편)

* 그냥 *



오래전에 인문고에서 논술을 가르쳤다. 그때 첫 수업할 때면 도입 단계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꼭 던졌다.

"자 사랑하는 남녀가 아래처럼 얘기를 나눈다고 치자."

“자기, 나 좋아해?” “응.”

“왜 좋아하는데?” “그냥...”

“그냥 좋아하다니...” “정말 나는 니가 그냥 좋아.”


그럼 이런 대화가 현실에 가능할까 하고 물으면 대답은 대부분 가능하다 말한다. 왜냐하면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많이 들어보았을 테니까. 이처럼 현실에선 ‘그냥’이란 말이 통한다. 그런데 논술에선 절대로 안 된다. '그냥'은 비논리적 단어이기 때문이다.

논술에서 ‘논(論)’은 ‘논리적’이라는 뜻이다. 논리적이 되려면 '그냥'이란 말 대신 ‘네가 이뻐서.’ ‘네 성격이 좋아서.’ ‘네 집이 부자라서.’라는 뒷말을 붙여야 한다. 그러고 보면 아마 우리가 사용하는 말 가운데 가장 비논리적인 낱말이 '그냥'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 말을 참 많이 사용한다.




며칠 전 오랜 벗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주 예전에 사귄 벗이건만 사는 곳, 하는 일이 다르다 보니 일 년에 한 번 만나기도 어렵고 하여 전화로 대충 때운다. 벗이 물었다.

“요즘 우찌 사노?”

“그냥 살지, 뭐.”

이번엔 내가 물었다.

“니는?”

“나도 그냥 그대로야.”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마음을 놓았다. 아마 벗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냥’

어찌 들으면 참 줏대 없는 말이다. 내 의지 없이 그대로 내버려 둔다는 뜻이니까. 허나 솜솜 뜯어보면 참으로 속 깊은 뜻을 담은 말이다.




앞에 사랑하는 남녀의 대화 형태로 돌아가 보자.

“자기 나 좋아?”

“응.”

“얼마큼?”

잠시 뜸을 들이다가,

“그냥 니가 좋아.”

이 대답에 발끈하는 여자는 ‘그냥’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다. 이때의 ‘그냥’은 어떤 계산도 없이, 어떤 비교도 없이 순수한 그대로의 그대를 사랑한다는 뜻이니까. 멋진 미사여구를 섞은 표현보다 더 담백하면서도 사랑의 무게감을 주는 말이 아닌가.




또 엄마 아빠가 자기 볼을 아기 볼에다 비비면서, “우리 아기, 그냥 이대로 곱게 자라줘.” 할 때의 ‘그냥’은 아무 탈 없이, 속 썩이지 말고, 착한 사람으로 무럭무럭 자라 달라는 바람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냥 있어도, 그냥 생각만 하여도, 가슴 설레는 사람이 있습니다.” 할 때의 ‘그냥’은 내 마음속에 언제나 그(그녀)는 살아 숨 쉬는 존재란 뜻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알고 지내다 어떤 사유로 하여 사이가 나빠져 소식 끊고 지내던 이에게서 모처럼 전화가 와 받았는데,

“그냥, 전화했어.”

이때는 말 그대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 여기서의 ‘그냥’은 예사 ‘그냥’이 아니다. 망설이다 망설이다 자존심을 죽이며 관계 개선을 도모하려 보낸 거니까.


며칠 전 전화에서 친구의 대답인 ‘그냥’은 작은 사업하던 중 코로나로 하여 힘들었는데, 현재는 그럭저럭 버티고 있다는 답이고, 나의 대답인 ‘그냥’에는 산골에 처박혀 자연인처럼 살지만 나름대로 잘 살고 있으니 염려 말라는 뜻이 담겼다.




오늘이라도 누가 여태 어떻게 지냈느냐 물으면 '그냥'이라 답할 것 같다. 참 싱거운 대답 같아 보이지만 어쩜 이 표현만큼 의미심장한 답이 또 있을까. 특별한 성취는 없으나 별일 없이 넘어왔다는 뜻이며, 다음에도 '그냥' 그렇게 넘어갔으면 하는 바람이 담겼으니까. 그래서 내년 이맘때도 '그냥'이라 답할 수 있으면 좋겠다.


끝으로 아주 오래전에 쓴 글 - 시라 썼지만 시가 아닌 것 같은 - 한 편 띄운다.


- 그냥 있어도 -


그냥 있어도

그냥 생각만 하여도

가슴 설레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작정 기대고픈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늘 버팀목이 되어주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항상 아픔과 고민을 의논하고픈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언제나 밤을 낮 삼아 통음하고 싶은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관심 없는 척해도 깊이 관심을 가져주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혼자임에도 혼자 아님을 푸근히 느끼게 해주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 하지 않아도 언제나 자리를 지켜주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말 한마디 없어도 열 마디의 말보다 더 포근히 만져주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나만을 아는 이에게 ‘함께함’의 바이러스를 옮겨 전염시켜주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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