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문현답(愚問賢答)

나이 일흔에 풀어놓는 소소한 이야기(제37편)

* 우문현답(愚問賢答) *



옛날 어느 산골마을 넓디넓은 타작마당에 늙은이들이 모였습니다.


모두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게 남은지라 몸 어디 한 군데는 반드시 탈이 났습니다. 그날도 그들은 양지쪽에 앉아 볕살을 쬐면서 이런저런 신세한탄하던 중, 누군가 뒷산에 도를 깨친 도사가 살고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깨우쳤다고 한들 얼마나 대단하랴 여겼지만, 그래도 자기들보다야 낫지 않을까 하여 다들 그 도사를 찾아가 보기로 하였습니다. 왜 신(神)은 사람으로 하여금 병 없이 살게 하다가 하늘로 불러올리면 그만이련만 온갖 병을 앓게 한 뒤에 데려가느냐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였지요.




힘들게 겨우 산에 올라 맨 처음 도사 앞에 나선 이는 평소 허리를 펼 수 없어 늘 구부리고 다니는 노인입니다.


노인 1 : 도사님 도사님, 저는 요즘 허리가 구부러져 위를 쳐다보기가 힘듭니다. 신은 왜 이런 형벌을 주셨을까요?

도사 : 너는 여태까지 높은 데만 바라보고 살아오지 않았느냐. 그러다 보니 점점 교만해지고 낮은 곳에 사는 이들을 멸시한 적도 많았겠지? 이제부터 위를 올려다보며 살기보다는 너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면서 그들의 입장을 이해해 보라는 뜻에서 그렇게 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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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눈이 나빠 앞이 잘 보이지 않게 된 노인이 나섰습니다.


노인 2 : 도사님, 전에는 아무리 좁은 바늘귀도 척척 찾아 꿸 수 있었건만 요즘은 콧구멍만큼 큰 구멍에도 제대로 꿰지 못할 정도로 눈이 침침해졌습니다. 신은 왜 이런 형벌을 주셨을까요?

도사 : 그래, 네가 눈이 밝았을 때는 온갖 것을 훤히 다 볼 수 있어 좋았을 거야. 하지만 그 눈으로 네 기둥나무만큼 큰 허물은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 남의 티끌만 한 허물은 잘 찾아내지 않았느냐. 그동안 지적질에 재미를 보았으니, 이제는 남의 허물을 대충 흐릿하게 보면서 네 큰 허물은 마음의 눈으로 보라는 뜻에서 그랬느니라.




세 번째 노인이 나섰습니다.


노인 3 : 도사님, 전에는 개미 기어가는 소리도 들렸건만 이제는 바윗돌 굴러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도 잘 들리던 귀가 왜 탈이 났을까요?

도사 : 살다 보면 들어야 할 말도 있지만 사실은 들어선 안 될 말이 훨씬 더 많으니라. 더욱이 너에게 충고하는 소린 들리지 않는 대신 너를 칭찬하는 말만 들려왔겠지? 이제 네 비위를 맞춰 주었던 말이 들리지 않게 되면 그제사 사람들이 진심으로 네게 하고자 했던 말이 떠오를 거야




네 번째 노인이 나섰습니다.


노인 4 : 도사님, 전에는 그 단단한 호두도 단숨에 깨뜨릴 수 있었건만 이제는 이가 다 빠져 잘 익은 토마토조차 제대로 씹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왜 제 이를 다 뽑아 가셨을까요?

도사 : 네 이빨이 단단할 땐 뭐든 빨리 부숴 먹지 않았느냐. 부숴 먹다 보니 그것의 참맛을 천천히 느끼기보다는 단숨에 맛보려 했겠지. 이제 천천히 녹여가며 먹어보렴. 참맛이나 참진리는 순식간에 오지 않고 느긋하게 즐기면서 맛보려 할 때야 비로소 제 모습을 보여준단다.




다섯 번째 노인이 나섰습니다.


노인 5 : 도사님, 저는 젊었을 때는 한밤중에 공동묘지 곁을 지나가도 무섭지 않았고, 강도를 만났을 때는 싸워 경찰에 넘긴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바람이 잎사귀 건드리는 소리에도 간이 쫄아졌습니다. 왜 제 간이 이리도 작아졌을까요?

도사 : 네가 간이 컸을 때는 얻은 것도 많았지만 때론 무모하게 덤벼들어 잃은 것도 많았지 않느냐? 힘차게 달려드는 용맹도 필요하지만 신중해져야 할 땐 신중해져야 한다. 한 방을 노리기보다 느긋이 기다릴 줄 아는 지혜를 기르라는 뜻이니라.




여섯 번째 노인이 나섰습니다.


노인 6 : 도사님, 전에는 몇 년 전의 일들을 다 기억했습니다만, 이제는 어제 일도, 아니 오늘 아침 일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 좋던 기억력을 왜 빼앗아 갔을까요?

도사 : 물론 살다 보면 기쁘고 즐거운 날도 있겠지? 그때 일들만 다 기억하고 싶지? 허나 아프고 괴로운 날도 있었을 거야. 더욱 기쁘고 즐거운 일보다 아프고 괴로운 일이 잘 안 잊혀져. 잊어야 할걸 잊지 않고 사는 것만큼 불행한 삶도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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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노인이 나섰습니다.


노인 7 : 도사님 전에는 이것도 이루고 싶고, 저것도 이루고 싶은 꿈을 가졌는데 이제는 다 없어졌습니다. 게다가 뭘 하나 이루고 싶은 게 따로 생기지도 않습니다. 왜 꿈이 없어졌을까요?

도사 : 너는 여태까지 큰 일만 꿈이라고 여겼잖느냐. 둘러봐라. 다들 가장 높고, 가장 크고, 가장 뻐길 수 있는 자리만 바라보는 저 꼴을. 큰 것 아닌 아주 자잘한 것에서도 충분히 즐거움을 찾을 수 있거늘. 조금씩 이뤄 가는 그게 꿈이라는 걸 모르다니, 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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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많은 이들은 도사와의 대화를 통하여 그제사 신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늙는다는 게 꼭 서러운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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