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택호(宅號)

나이 일흔에 풀어놓는 소소한 이야기(제34편)

* 아내의 택호(宅號) *



몇 년 전 어느 날(2021년 9월 4일) 아침이다.

밖에서, “새댁 있능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른 이는 아랫집 가음댁 할머니고, ‘새댁’은 아내를 가리키는 호칭이다. 초등학교 다니는 외손녀 둘에 두 돌 지난 손자까지 하여 손주가 셋이나 되건만, 그리고 아내는 별로 동안도 아니건만, 할머니는 이사 첫날부터 아내더라 ‘새댁’이라 부른 뒤 그 호칭을 버리지 않는다.


우리 마을에서 아내를 부르는 호칭은 ‘새댁’ 말고 ‘정선상댁’이 있다. 이는 감골 어른을 비롯한 여러 분이 부르는 말이고, 또 하나가 더 있는데 오직 한 분만 쓰는 ‘태백이 엄마다’다. 이는 아랫집 박씨 아주머니만 부르는 호칭이다.

태백이는 우리랑 같은 날 달내마을에 와서 16년을 살다 재작년 겨울(2019년 12월 3일)에 하늘로 간 풍산개 이름이다. 녀석이 간 지 3년이 다 돼 가지만 아주머니는 아내를 그리 부른다. (그 아주머니도 작년에 돌아가셔서 '태백이 엄마'라고 부를 사람은 안 계심)


다른 할머니들에게는 부르는 택호가 있으니 ‘내선댁’, ‘성산댁’, ‘구어댁’, ‘한국댁’, ‘수국댁’, ‘토산댁’, ‘기정댁’, ‘수동댁’ 등이 바로 그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꽃」에 나오는 시구처럼 사람들은 각각 제 이름으로 불릴 때 그 존재 의미를 지닌다. 하기야 태어나 출생 신고에 가장 중요한 목록이 태어난 날짜가 아니라 이름 아닌가. 대부분 그 이름을 평생 가지고 살아가니까.

어린이집에, 유치원에, 학교에, 군대에, 직장에, 그리고 결혼식장에도 그와 그녀의 이름이 붙는다. 이름 없으면 존재의 의미를 잃으니까. 이렇게 소중한 이름이 예전에 여자들은 결혼 전까지 쓰다가 결혼하면서 이름(본명)을 잃고 대신 택호(宅號)를 얻었다.

택호는 주로 여성의 출신지에 따라 붙었는데, 주변 리(里)에서 왔으면 그곳 리 이름을 따 ‘하서댁’ ‘읍천댁’ ‘석촌댁’ 하고 불린다. 가까운 곳이 아닌 먼 곳에서 오게 되면 그 시나 군 이름을 따서 붙인다. 즉 마산에서 왔으면 ‘마산댁’, 하동군에서 왔으면 ‘하동댁’처럼.




우리 마을 할머니들은 모두 가까운 리(里)에서 시집오다 보니 다들 ‘리’ 이름이 붙은 택호를 가졌다. 구어리에서 와서 ‘구어댁’, 토산리에서 와서 ‘토산댁’ 등. (실제로는 ‘댁’이라 하지 않고 ‘띠기’ 아니면 '떼기'라 한다. ‘토산띠기’, ‘구어떼기’처럼)


헌데 고향과 전혀 관계없는 엉뚱한 택호를 가진 할머니가 계신다. 바로 우리와 가장 친하게 지내는 가음댁 할머니다. 할머니는 우리 마을에서 가까운 명촌리 출신이기에 ‘명촌댁’이란 택호를 가져야 했다. 허나 먼저 그곳에서 시집온 선배 할머니(지금은 안 계심)가 그 택호를 쓰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고향과는 별도로 가음댁이란 택호를 가졌다고 한다.

여자들이 택호를 사용하면, 남자들은 택호 뒤에다가 ‘어른’이나 ‘양반’을 붙여 부른다. 예를 들어 ‘가음댁’ 할머니의 남편은 ‘가음 어른’이나 ‘가음 양반’으로. 또래 어르신들끼리는 ‘어이, 가음이!’ 하고 부른다.




마을에 오래 산 할머니들은 다 택호를 가지지만 도시나 다른 곳에서 들어온 외지 여성은 택호 대신 각기 특징에 맞게 이름을 얻었다. 된장 만들어 파는 분은 ‘된장 아지매’로, 교회 열심히 다니는 분은 ‘교회 아지매’로, 근처 절에 자주 다니며 일 도와준 분은 '보살 아주머니'로.


이와 별도로 아주 엉뚱한 호칭을 얻은 할머니가 한 분 계신다. 이 할머니는 그냥 ‘박씨 아지매’다. 그러면 다들 “아, 성이 박씨며, 나이가 비교적 젊겠구나.” 할 게다. 허나 성은 ‘민씨’며, 나이도 살아계시면 올해 여든이다.

‘민씨 할머니’라 불러야 함에도 ‘박씨 아주머니’가 됨엔 다 이유가 있다. 일단 성씨가 바뀐 건 그분의 남편이 박씨라 남편 성을 따라 붙여졌다. 게다가 워낙 동안이라 나이는 할머니 급이건만 그리 부르기 좀 애매하여 ‘아지매’ 하다 보니 ‘박씨 아지매’가 되었다.




아내는 앞서 언급한 대로 ‘정선상댁’ 또는 ‘태백이 엄마’로 불리는데 나 듣기엔 둘 다 마땅치 않아 한다. 그래서 “당신은 언양에서 왔으니 언양댁이라 부르라고 어르신들께 얘기할까?” 하니 그것도 싫단다.

우리 집에 100년 된 뽕나무와 감나무가 자랑이라 ‘뽕나무댁’이나 ‘감나무댁’으로 부르라고 하고 싶지만 그건 내가 마땅찮다. 뽕나무댁은 영화 ‘뽕’을 연상케 하는 택호라 꺼려지고, 감나무댁은 태풍에 잘 부러지니 명이 짧은 듯하여 그 호칭도 안 좋다.

그럼 손주 이름을 붙여 ‘ㅇㅇ 할머니’가 괜찮을 듯하나 아내가 그것도 싫단다. (하기야 아직 할머니 축에 끼지 못하니까) 혹 속으로 ‘새댁’이란 호칭을 계속 듣고 싶은 건 아닐까? 여자는 나이 들어도 젊다는 느낌을 받고 싶어 한다니 말이다.

어쩌면 두 달 전 아침 가음댁 할머니가 갖다 준 열무 두 단보다 새댁이란 호칭이 삶의 낙을 주는 게 아닐까?

*. 오늘 글은 '목우씨의 일기장(2021. 11. 5)'을 정리한 내용이며, 사진은 제가 사는 달내마을 '봄, 여름, 가을, 겨울'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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