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6편 : 이병률 시인의 '이사'
@. 오늘은 이병률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이사
이병률
이삿짐을 싸다 말고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피우다 보니
그냥 두고 갈 뻔한 고추 몇 대
미안한 마음에 손을 내미니
빨갛게 매달린 고추가
괜찮다는 듯 떨어진다
데려가 달라고 하지 않으면
모른 체 데려가 주지 않을 생(生)
새벽 하늘을 올려다보니
눈을 찌르는 매운 물기
-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2005년)
#. 이병률(1967년생) : 충북 제천 출신으로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현재 여러 방송의 구성작가로 활동 중이며, 출판사 [달]의 대표임.
<함께 나누기>
화자는 오늘 이사를 가려합니다. 살림살이가 나아져 지금보다 더 넓고 고급주택으로 이사 가는 사람들이야 좋겠지만, 빚에 쪼들리거나 형편이 어려워져 전보다 못한 곳으로 이사 가는 사람은 마음이 서글퍼집니다.
하필 그럴 때 비가 옵니다. 햇빛이 쨍쨍해도 마음이 심란한데 비마저 옵니다. 그리고 평수가 적어지다 보니 함께 할 수 없는 이삿짐은 갖고 갈 수 없어 버려야 합니다. 이래저래 마음이 아픕니다.
이 시는 이런 기분을 한 번이라도 느껴본 이가 읽는다면 확 다가올 겁니다.
“이삿짐을 싸다 말고 /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피우다 보니 / 그냥 두고 갈 뻔한 고추 몇 대”
애연가라면 담배 피우고 싶을 때라 피우겠지만 여기서는 떠나기 아쉬운 심란한 마음에 입에 뭅니다. 그때 무심코 돌린 눈에 들어온 고추 몇 포기. 화자는 옥상 사과 궤짝 같은 데다 고추 몇 포기를 심었나 봅니다.
그걸 잊었습니다. 들고 가본들 별 도움 안 되나 거기에 나름 시간과 정성을 다 쏟았습니다. 정성 듬뿍 담아 키운 고추를 깜빡 잊었습니다. 더욱더 큰 문제는 그걸 갖고 갈 수가 없다는 점. 이사 가는 그 집이 너무 좁아 둘 수 없습니다.
“미안한 마음에 손을 내미니 / 빨갛게 매달린 고추가 / 괜찮다는 듯 떨어진다”
화자의 마음을 고추가 읽었는지 미리 떨어져 줍니다. 마음 편하게 놔두고 가라는 뜻이겠지요. 아마 화자의 속은 더욱 쓰릴 겁니다. 참 대단합니다. 고추에 감정이입해 화자의 마음을 배려하도록 함이. 이런 섬세한 표현력이 시를 읽게 만드는 요인이겠지요.
“데려가 달라고 하지 않으면 / 모른 체 데려가 주지 않을 생(生)”
고추 얘기에서 시가 확 변합니다. 우리네 삶은 내 의지로 움직일 때보다 어쩔 수 없이 주변 여건 따라 움직일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러니 나를 데려가 달라고 조르지 않으면 모른 체 외면당해 버리는 게 생(生)입니다. 이런 현실을 인식하니 더욱 서글픕니다.
그래서 매달려 애원하기도 합니다. 허나 삶은 참 냉정합니다. 이삿짐 싸고 싶지는 않으나 찌푸린 날 새벽, 등 떠밀려 나가듯 떠나야 하는 가난한 이의 이사 장면.
“새벽 하늘을 올려다보니 / 눈을 찌르는 매운 물기”
하늘을 올려다보니 물기가 배어 있습니다. 비가 올 것 같다는 얘기지요. 그것도 고추처럼 매운 세태를 드러내면서 말입니다. 아니 하늘보다 화자의 눈에 먼저 눈물이 맺혔습니다.
이사가 단지 짐만 옮기는 행사라면 이런 애달픔은 없겠지만, 우리네 삶 자체가 옮겨갑니다.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듯이 거기에 억지로 맞춰야 합니다. 넓은 집에서 좁은 집으로 이사 가면 한동안 적응하기 힘들다고 하지요.
여기서 화자의 시선을 한 번 따라가 볼까요? 옥상에 올라가 담배 한 대 피우면서 사과궤짝에 담긴 고추를 봅니다. 여기까진 거의 수평입니다. 그러다가 고추가 떨어집니다. 눈이 수직으로 하강합니다. 그러다가 다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수직으로 상승합니다. 시선의 하강과 상승의 이미지가 잘 표현되었습니다.
혹 형편이 더 못해 평수가 좁은 곳으로 이사 가야 한다면 갖고 가고 싶으나 갖고 갈 수 없는 걸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만약 이사를 간다면 가장 가슴 아플 부분은 책입니다. 책을 대부분 버려야 합니다. 현재는 그냥 두면 되지만 좁으면 둘 곳 없으니까요.
*. 사진은 모두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