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일흔에 풀어놓은 소소한 이야기(제86편)
<하나>
15년 몰던 ‘모닝’이 너덜너덜해져 폐차장에 갔다. 15년에 23만 km면 아직 몰아도 되지 않느냐는 말도 들을 만한데 그냥 보내기로 했다. 문제는 몇 번의 사고로 망가질 대로 망가진 데다 차를 몰 때마다 아래쪽에 계속 들리는 잡음. 카센터에선 60만 원 들어야 잡을 수 있다 하니...
폐차장에 들어서니 엄청나게 많은 차들 가운데 제대로 된 차들도 보여 여기 직원이나 고객 차인가 했더니 거기 일하는 분이 겉만 멀쩡하고 속은 완전 고물차라나. 그러면서 하는 말, “우리 사람이랑 차가 똑같아요. 겉은 멀쩡지만 속은 고장 난 사람 많듯이.”
‘차량 말소 등록’ 절차를 밟는데 담당자 책상 위의 전화가 연신 울어댔다. 가만 들으니 차에 필요한 부품을 구하는 모양. 궁금하여 물었다.
“폐차에 달린 부품 구하는 사람이 많은가 보죠?”
“겉은 멀쩡한데 속이 고장 난 차도 많지만, 겉은 형편없으나 속 부품은 재활용 가능한 차도 많아요.”
하기야 폐차장에 차를 가져가면 돈을 준다. 내가 받은 돈만 해도 무려 45만 원. 그러면 그들 업체는 뭘 먹고 사는가? 바로 부품으로 이익 남긴다. 돈 얼마 안 되는 자잘한 부속부터 제법 돈 되는 부속까지 쉴 새 없이 찾는단다. 30분 남짓한 시간에 엿들은 전화만 해도 열 통 남짓.
직접 찾아온 손님이 하는 말,
“그랜저 촉매변환기 있어요?”
그게 뭔지 모르는데 기사는 찾아와 보여주더니 흥정을 한다. 그러니까 어떤 자동차든 필요 부품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이다. 폐차장에선 부품 팔아 돈을 벌어서 좋고, 고객은 필요 부품을 싸게 사서 좋고, 지구는 환경 면에서 재활용해 좋다.
<둘>
어제(5월 8일) [매일신문]에 난 기사다.
- 장기 기증한 간호사 어머니, 그 딸들도 간호사 되어 생명을 돌보다 -
김연주·김정은 씨의 어머니 양은영 씨는 남편이 운영하는 중국집 화장실에서 급성 뇌출혈을 앓고 쓰러져 뇌사 상태에 빠졌다. 가족들은 고민하다가 생명 연장을 포기하는 대신 장기 기증을 선택했고 어머니는 5명의 목숨을 살린 뒤 영면에 들었다.
어머니가 쓰러졌던 2012년 1월 21일. 큰딸 연주 씨는 그날의 기억이 비교적 선명하게 떠오른다. 중학교 3학년을 앞두고 봄 방학식 날 아침, 포항시 북구 청하면에 살던 연주 씨는 어머니 양은영 씨가 몰던 차를 타고 학교에 도착했다.
"잘 다녀와, 우리 딸!" 매일 데려다 주면서도 처음인 것처럼 환하게 웃어주던 어머니. 그날 이후 연주 씨는 더 이상 어머니의 배웅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던 중 셋째 외삼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연주야 어머니가 쓰러졌어. 빨리 병원에 와야 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전직이 간호사였던 양은영 씨는 남편과 함께 중국집을 운영했고, 잠시 다녀온다던 화장실에서 1시간이 넘도록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정신없이 달려 도착한 병원. 몇 시간 전만 해도 다정하게 속삭이던 어머니 입가에는 인공호흡기가 달렸다. 피가 순환되지 않으면서 발생한 '급성 뇌출혈'.
손쓸 방법이 없다는 말에 천주교 신자였던 외가 식구들이 장기 기증을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나눔이라는 선행을 베풀면 엄마가 더 좋은 곳으로 갈 수 있을 거야…."
아내를 눈물로 보내야만 했던 아버지도 이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은영 씨는 5명의 목숨을 살리고 영면에 들었다.
큰딸인 연주 씨와 정은 씨는 커서야 어머니의 장기기증이 얼마나 숭고한 나눔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간호사로 늘 생명을 살피는 연주 씨는 새삼 깨닫는다. 서로 다른 이들의 몸에서 나온 장기가 한 생명을 다시 뛰게 한 일, 그 위대한 일을 자기 어머니가 했다는 사실이 존경스럽다.
간호학과 대학생인 동생 정은 씨도 어머니가 장기 기증한 일에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평균적으로 뇌사자가 3~4개의 장기를 기증한다고 들었어요. 우리 어머니는 다섯 명을 살리셨어요. 그 자체로 정말 대단한 거죠."
끝으로 두 딸은 장기 기증은 하늘로 가기 전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봉사라고 했다.
"기증자와 최종적으로 장기 이식에 동의하는 가족들은 사회에서 영웅 대우 받아야 합니다."
오래 전 아는 이가 장기기증 증서에 사인하기를 권하기에 그때서야 무심코 했다. 이제 가만 생각하니 그 일이 얼마나 거룩한 일인지...
<셋>
차량 말소를 위해 운전면허증을 꺼내다 묘한 걸 보았다. 면허증 사진 아래 선명하게 적힌 ‘장기·조직 기증’ 기억이 잘 안 나나 면허증 갱신할 때 교통사고로 뇌사 상태에 빠지면 장기 기증 의사가 있느냐 하여 그렇다고 하니까 그 사실을 적어놓았나 보다.
당시에는 별 생각 없이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내 장기가 어디에 쓰일까 너무 궁금하다. 왜냐면 내 몸은 워낙 망가져 재활용할 장기가 없다고 여겨져서. 눈은 거의 시각장애인에 가깝고, 머릿속도 다 망가져 기억력이 젬병, 심장도 부정맥, 당뇨로 쪼그라든 콩팥... 이리저리 따져봐도 쓸 만한 게 하나 없는데...
도로 위를 주행하기 거의 힘든 차도 폐차장에 가면 쓰임이 있다. 변속기 아니면 냉각장치, 그도 아니면 타이어. 그러니까 아무리 망가져도 필요한 부속은 하나쯤 있다는 말이다. 하기야 그렇지 않으면 돈을 주고 폐차를 받을 까닭이 어디 있으리오.
폐차와 인간 장기를 똑같은 무게로 비교할 순 없다. 다시 돌아가게 만든다는 점에선 같을지 몰라도. 다시 생명력 얻게 만드는 인간의 장기에 '위대하다'란 말을 붙일 수 있지만 폐차에겐 붙일 수 없으므로.
허나 폐차가 어느 한 구석은 쓸모 있다면 내 몸도 쓸모 있지 않을까. 그게 뭘까 하고 생각해 보나 잘 잡히지 않는다. 그래도 내 장기 중 하나쯤은 다른 이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위로해 본다. 폐차의 부품처럼 하나쯤 쓸모 있기를. 그래서 누군가에게 도움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