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일흔에 풀어놓는 소소한 이야기(88)
<하나 : 부주의 맹시(盲視)>
1999년 미국의 심리학자 다니엘 사이먼스와 크리스토퍼 차브리스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고릴라’를 활용한 특이한 실험을 한다. 학생들을 각각 3명으로 나눈 뒤 한 팀은 흰옷을 다른 팀은 검은 옷을 입게 한 뒤, 이들이 농구공 패스하는 장면을 찍어서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흰옷 입은 팀의 패스 수를 세게 했다.
1분 남짓한 동영상을 보여준 뒤 두 학자는 학생들에게 “동영상에 등장한 고릴라를 보았는가?”라는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실제로 동영상에는 고릴라 옷을 입은 한 사람이 패스하는 사람 사이를 지나가면서 가슴을 두드리고 정면을 응시하는 장면이 9초가량 나왔다.
그러나 피실험자의 약 50%는 패스 횟수를 세는 데만 집중해 명백히 보이는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 이 실험의 핵심은 패스의 횟수를 세도록 한 것이다. 참여자들은 두 팀 중 한 팀의 패스만 정확히 세기 위해 모든 주의를 기울여서 공의 움직임을 쫓았다. 그 결과 주의를 두지 않았던 대상인 고릴라를 보지 못한 것이다.
주의를 충분히 두지 않으면, 눈을 뜨고 있어도 눈이 먼 것처럼 앞에 있는 걸 보지 못하는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 밝혀냈다. 여기서 나온 심리학 용어가 바로 '부주의 맹시(Inattential blindness, 혹은 ‘무주의 맹시’)'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맹인(盲)이 보는(視)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이 이론의 예를 들자면 갑이란 이가 고민거리가 생겨 거리를 걷던 중 아는 사람이 지나치면서 손을 흔들며 인사하자 그도 무심코 손을 흔들었다. 며칠 뒤 갑이 그 사람을 다시 만나 얘기하던 중 그가,
“그날 어디로 가는 길이었어요?"
"무슨 말인지요?"
"아 그저께 제가 손 흔들자 따라 손 흔들었잖아요."
"그저께 당신 본 적도 없고 손 흔든 적도 없는데..."와 같은 경우.
<둘 : 부주의 농청(聾聽)>
‘부주의 맹시’가 이미 학계에 알려진 이론이라면 ‘부주의 농청’은 내가 만들어낸 단어다. 특별히 연구해 얻어낸 결과가 아니라 부주의 맹시를 모방해 만든 용어. 즉 맹시(盲視)가 눈은 떠 있으나 보지 못할 때 쓴다면, 농청(귀먹을 '聾' 들을 '聽')은 귀는 열려 있으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경우에 쓴다.
얼마 전 시골집에서 지내는데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쿵쿵하는 소리에 아내랑 둘이 마주 보는데 아내가 먼저 말했다.
“저 윗집에 손님들 몰려왔나 봐요. 저번 주말에도 많이 몰려와 한참 요란하게 놀더니만...”
그 말 받아 내가 말했다. “위쪽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닌 것 같은데. 저 아래 김사장 집에 다시 공사하나 봐. 저번엔 테라스를 쭈욱 빼내더니만.” 그 말에 아내는 위에서 들린다고 했고, 나는 아래에서 들리는 소리가 분명하다고 했다. 그래서 확인하려 나가 봤다.
둘 다 틀렸다. 위도 아래도 아닌 오른쪽 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소린 신나게 노는 소리도, 집 고치는 소리도 아닌 경운기로 밭을 뒤집는 소리였다. 왜 둘 다 틀렸을까, 경운기 소리야 시골에선 자주 듣는 소리 아닌가. 그럼에도 한 사람은 신나게 노는 소리로, 다른 한 사람은 집 고치는 소리로 들었으니.
저번날 좀 떨어진 윗집에 손님이 와 밤늦게까지 노는 바람에 조용한 동네가 한동안 떠들썩했다. 그 소리가 아내에게 스트레스 줬던 모양이다. 그럼 나는? 아랫집에 이사온 뒤 시도 때도 없이 새로 달아낼 건 달아내고 뜯어낼 건 뜯어내는 수리 소리에 예민했던 참이었으니.
이처럼 우리는 딴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판단할 때 그 소리가 어디서 어떻게 나는가를 확인하기보다 내 기준과 기억에 맞는 소리로 확정하는 경향이 더러 있다. 이를 가리키는 심리학 용어가 따로 있는지 모르겠으나 일단 부주의 맹시란 말에서 힌트를 얻어 '부주의 농청'이라 해 본다.
<셋 : 맹시와 농청이 합치게 되면>
부주의 맹시와 부주의 농청이 발생하는 이유는 우리 인간의 주의 기울임이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매우 적기 때문이다. 처리 용량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일부의 정보에만 주의한다. 그러니까 내가 주의 기울이거나 평소 내 기억 속에 있는 정보를 활용한다.
나이가 제법 되다 보니 만나는 이들은 대체로 보수적인 정치관을 갖고 산다. 그 가운데 드물게 한 이가 꽤나 진보적이다. 그가 며칠 전 겪은 일을 얘기했다. 운동 삼아 00공원을 한 바퀴 도는데 앞서 한 늙은이가 유튜브 틀고 가는데 지나가는 사람에게 다 들릴 정도였다.
잠시 들으니 이름만 대면 다 아는 극우유튜브가 방송하는 소리였다. 방송국에서 하는 정규방송이라면 몰라도 그런 유튜브를 들으니 확 짜증이 나 한마디 했다나. 그 뒤 이어지는 얘긴 하지 않아도 되리라. 둘은 말로 심하게 다퉜고 입에서 쌍욕도 내뱉었는가 보다. 나랑 전화하면서도 분기를 참지 못했으니.
끊고 나서 혼자 슬며시 웃었다. 평소 그는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진보유튜브 방송을 끼고 산다. 내게 던지는 얘긴 대부분 거기서 얻은 정보를 전했다. 한 번은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도 이어폰을 귀에 꽂고 뭔가를 열심히 듣기에 뭘 하느냐 하니까 손가락을 잠시 입에 대더니 오늘 중요 인물이 초대손님으로 나온다나.
보수든 진보든 날마다 그런 유튜브 방송을 듣고 보는 사람은 정규뉴스에 누군가 잘못을 저질러 수사받고 있단 소식이 나오면 대뜸 한마디 한다.
“저 새끼 저거! 까불 때 알아봤다. 내가 절마 저거, 얼마 못 간다 했지.”
그런데 자기 쪽 정치인이 수사받고 있다면 달리 말한다.
“그럴 수 있지. 사람이 어떻게 실수 한 번 안 하고 살 수 있나.”
나와 반대가 되는 사람에겐 무한 비판적이고, 나랑 우군이라 여기는 이에겐 거꾸로 무한 긍정적이다. 아무리 일 잘해도 지적하고, 아무리 못해도 칭찬하거나 비호한다. 이제 한 번쯤 아닌 습관으로 아예 굳어졌다.
부주의 맹시나 부주의 농청, 즉 한 가지 일(또는 이념)에 빠지면 정작 봐야 하거나 들어야 할 걸 놓치게 된다. 어느새 우리 사회는 부주의 맹시와 부주의 농청이 더해진 상태가 되었다. 눈은 있으나 당달봉사가 되었고, 귀도 있으나 귀머거리가 되고 말았다.
아, 제발 눈 뜨고 귀 열며 살아야 할 텐데... 나부터 먼저 그리 살아야 할 텐데...
https://youtu.be/5125PFt_TwA
보이지 않는 고릴라
크리스토퍼 차브리스, 대니얼 사이먼스
www.youtube.com
*. 영상과 사진은 모두 인터넷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