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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처럼...(89)

나이 일흔에 풀어놓은 소소한 이야기(제89편)

* 늑대처럼... *



<하나 : 늑대 사냥법>


여기저기 두루 퍼져 전해오는 ‘에스키모인의 늑대 사냥법’을 한번 봅니다.

“짐승의 피를 잔뜩 묻힌 칼날 위에 얼음을 얼려 칼날이 위에 오도록 세워두면 피 냄새를 맡은 늑대들이 다가와 얼음을 핥아댄다. 이내 날카로운 칼날이 드러나지만 이미 피 냄새에 감각이 둔해진 혀는 핥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다 혀가 칼날에 베어 늑대의 피도 흐르고 다시 그 피 냄새를 맛본 늑대는 자신의 피인 줄도 모르고 핥기를 멈추지 않는다. 끝장을 볼 때까지 핥다가 너덜너덜 찢어진 혀를 빼어 문 채 눈밭을 붉게 물들이며 피 부족으로 늑대는 서서히 죽어간다. 에스키모인이 하는 일이라곤 그저 늑대를 가만히 주워오는 일뿐이다.”



이 에피소드는 우리나라 여러 책에 소개되었지만 사실 그 글을 쓴 분의 창작물이 아니라, 1960년대 미국의 한 라디오방송에서 주변에 떠도는 얘기를 모아 들려주는 시간에 언급된 이야기랍니다. 이 일화에는 그럴싸한 교훈이 담겨 여러 곳에 인용됩니다.

특히 신부와 목사 같은 종교인들이 ‘사탄의 유혹’ 들먹이면서 강론에 쓰기 참 좋습니다. 정치적인 비판을 할 때도 활용됩니다, 포퓰리즘을 예로 들면서. 무상복지 등 ‘무상’이란 말에 맛 들이면 나라 경제 망친다는 둥.

이 일화에서 에스키모인이 실제 늑대 잡을 때 이렇게 하는지 아닌지가 중요하진 않겠지요. 중요한 건 그 속에 담긴 메시지이니까요. 우리가 악의 구렁텅이에 빠져들 때 처음엔 경계하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고, 그 익숙함에 편해졌다 싶을 즈음엔 이미 깊숙이 빠져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상당히 비유적인 '피 묻은 칼날'은 섬뜩할 정도로 무섭습니다.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에야 그 위험성 깨닫게 되니까요. 술, 도박, 마약에 닿기 전에는 경계의 대상이지만 한 번 두 번 거듭되면서 중독이 됩니다. 뿐인가요, SNS 중독도 마찬가지겠지요.
어떤 유혹이든 거기에 빠지게끔 달콤한 미끼가 놓입니다. 죄를 지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뭐 이 정도야 괜찮겠지’ 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발이 푹 담기면서 돌이킬 수 없습니다




<둘 : 늑대와 개의 본성>

다음은 몽골에서 순록을 키우며 사는 이들을 찾아가 함께 생활하며 관찰한 바를 적은 책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몽골 초원에 사는 주민들이 가장 싫어하는 동물은 늑대다. 자기네가 키우는 양이든 순록이든 순식간에 해쳐버리니까. 당연히 늑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애쓰는 일이 주요한 일이 돼 버렸다. 해서 한 번씩 마을 장정들이 모여 날을 잡아 늑대 사냥에 나선다.
한 주민이 늑대 사냥 나갔다가 몇 마리를 죽이고 오는 길에 어디선가 ‘낑낑’ 하는 소리가 들려 그 소리에 끌려갔다가 새끼 늑대 한 마리를 보았다. 처음에는 어차피 이놈도 크면 자기네 순록을 죽이겠다 싶어 총을 쏘려다 그 순진무구한 눈망울을 보는 순간 그만 총을 내려놓고 데려와 키웠다.
새끼늑대는 아주 어려서부터 키우선지 주인의 말을 잘 듣고 다른 동물을 해치지 않아 반려동물처럼 지내게 되었다.




그의 이웃에는 다른 일이 벌어졌다. 집에서 키우던 개가 뛰쳐나가 잡지 못했는데 나중에 늑대 무리와 어울려 다니며 가축을 해치는 존재가 돼 버렸으니. 어느 해 마을 주민이 힘을 합쳐 나선 사냥길에 많은 늑대를 사살했는데 그 가운데 한 녀석의 목에 목줄이 보였다 바로 뛰쳐나간 반려견이었다.
그 개는 엉덩이 쪽에 총을 맞고 쓰러졌을 뿐 생명에는 지장 없어 어쩔까 하다가 데려왔고. 그 개를 늑대 새끼 키우는 집에 보내 함께 키웠고... 한 해가 지나는 가운데 신통하게도 늑대와 개 두 마리는 마치 한 배에서 나온 형제처럼 매우 친하게 지냈다.
처음에는 둘 다 야성을 지녔다고 여겨 생고기를 주다가 구운 고기로 바꾸고, 더 시간이 지나 사료 비슷한 먹이로 바꾸었고. 그러던 어느 날 주인 부부가 급한 일로 멀리 떠나야 할 일이 생겨 이웃 사람에게 순록 먹이와 개와 늑대 사료까지 챙겨주라고 부탁하고 갔다.




그 사이에 이웃 사람이 담을 쌓다가 떨어져 발을 부러뜨리는 바람에 거동이 불편해 겨우 자기 식사만 할 뿐 동물들의 먹이를 주지 못했다. 며칠 뒤 주인 부부가 먼 길 갔다가 돌아왔더니 난장판이 돼 있었는데 이미 순록 몇 마리는 물어뜯겨 뼈만 남아 있고.
처음엔 자기들이 가고 난 뒤 늑대 무리가 쳐들어왔나 하였다. 늑대 같은 맹수에게 뜯긴 상태가 뚜렷했으니까. 그런데... 그런데 알고 보니 새끼 때부터 기른 늑대 짓이었다. 원래 야생늑대라도 새끼 때부터 길러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곤 상상 못했는데. 거꾸로 성견이 된 상태에서 들개로 살다 잡혀와 다시 길들여진 개는 살이 빠질 대로 빠져 완전 홀쭉한 상태였고."

그때 함께 실은 전문가의 말이 기억납니다.
“개는 아무리 들개로 살아도 반려동물이란 본성을 버리지 않으나, 늑대는 아무리 인간이 애지중지 키워도 맹수의 본성을 버리지 않습니다.”
거기서 이런 말도 덧붙였습니다.
“주인이 개에게 썩은 고기를 주면 개는 마지못해 먹지만, 늑대에게 썩은 고기를 주면 도로 그 고기 준 주인을 물어버린다고.”



<셋 : 늑대처럼 살고 싶다>

첫째 에피소드에서 늑대의 결점이 잘 드러났습니다. 유혹에 빠져 저 죽을지 모르고 달려드는 어리석은 동물이라고. 그래서 종교인들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의 석학들이 그런 점을 이용해 글을 쓰고, 강론을 하고, 예로 들고...
헌데 이걸 결점으로 볼 수 있지만 달리 장점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자기가 좋아하는 한 지점에 빠지면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고. 비록 목숨이 위태롭더라도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끝까지 해내려는 뚝심과 열정을 지녔다고.

둘째 에피소드에서는 사람이 아무리 애써 늑대를 길들인다고 해도 늑대는 결코 원래의 맹수 본성을 절대로 잊지 않고 산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한순간 누군가에게 끌릴지 몰라도 결코 완전히 그에게 길들여지지 않는 나는 독립된 개체일 뿐 어딘가에 어느 누구에게 소속되지 않는다고.




한번도 늑대처럼 사람이든 사랑이든 목숨을 걸 만큼 열정적으로 매달려 본 적 없고, 한 번도 또라이 소리 듣지 못하고 대충 적당히 그럭저럭 살아온 저로선 지금 이 순간 늑대가 부럽습니다. 그렇게 살고 싶은데...

*. 사진은 모두 출처를 밝히지 않아도 되는 픽사베이(pixabay)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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