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일흔에 풀어놓은 소소한 이야기(제87편)
* 아, 황포돛대! *
요즘 ‘스승의 날’을 잊고 산다. 그럼에도 잊지 못하게 만드는 일이 생긴다. 오래전에 인연 맺은 제자들의 안부전화. 한 제자는 해마다 명절이나 스승의 날에 선물을 보내주는데 어제도 그랬다. 무슨 날이지 하다가 선물 받고서야 그날을 기억해 냈다. 내가 참 무디게 산다.
그 제자와 만난 해는 지금부터 대략 45, 6년 전쯤. 그러니까 부산 모 여중 2학년이던 열다섯 살무렵. 까마득히 오랜 세월이다. 그때 제자 얼굴 하나둘 떠올리다 갑자기 떠오른 한 소녀. 특별히 공부 잘하거나 착하거나 하는 아이가 아닌 아주 유별난(?) 소녀.
그 소녀는 내 반 아이가 아니었으나 수업에 들어가기에 거의 매일 만났다. 하필 그 소녀의 자리는 교탁 바로 아래였고. 그 반에서 가장 키가 작았으니까 거기 앉도록 했지만 담임선생님의 아주 뜻깊은 배려(?)가 숨어 있었다. 딴짓 못하도록.
그해 처음 그 학교로 옮긴 터라 그 애뿐만 아니라 수업 들어가는 모든 소녀들의 1학년 때 모습을 알지 못했다. 첫날 내 바로 앞자리 앉은 선생님이 한 소녀를 불러와 바로 의자 옆에 꿇어앉게 하고선 이렇게 말씀하셨다. (‘꿇어앉힘’은 당시 흔한 교무실 모습)
“돛대 너, 한 번만 더 애먹이면 가만 안 둔다, 응! 1학년때 하도 애먹여 다른 선생님이 아무도 너를 담임 안 맡으려 해서 내가 맡기로 했잖아!”
그리고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더니,
“첫날부터 짝지를 두들겨 패 울게 만들지 않나... 참 어이가 없다! 둘째 날도 아니고 첫날부터 말이다!”
그렇게 만난 돛대, 첫날부터 담임께 불려 와 무릎 꿇은 사유가 궁금했는데 그 잘못이 짝지를 두들겨 팼다니. 아무래도 이해가 안 되었다. 서두에 언급했다시피 그 소녀는 그 반에서 가장 작았다. 아니 나중에 알고 보니 학년 전체에서 키가 가장 작았다. 헌데도 다른 애를 패다니?
돛대를 알게 되기까지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바로 첫 수업시간에 자신의 진가(?) 확실히 보여줬으니 말이다.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 저 화장실 가도 돼요?”
여중 여고생이 수업 중이라도 화장실 가겠다 하면 보내줘야 한다고 이미 선배 교사로부터 가르침 받았던 참.
한참 지나 들어오더니 하는 말, “큰거 보고 왔어요.” 따로 묻지 않았건만 부연설명까지 해주는 게 아닌가. 다시 얼마 지나지 않아 칠판에 판서하고 있는데 바로 뒤에서 소란이 일었다. 이번에는 짝지에게 이것 빌려 달라, 저것 빌려 달라 하는 모양새.
“지금 필요한 것 아니면 쉬는 시간에 빌려 달라 해라.” 하는 말을 받아서, “지금 필요해요.” “뭔데?” “점심때 빵 사 먹을 돈요.”
순간 가만 놔두면 머리끝까지 기어오르겠다 싶어 이마에 ‘내 川 자’를 그리고선 언성을 높이며, “수업 중에 학습과 관련 없는 짓 하면 용서 없다!!!”
잠시 입 삐죽거리며 뭔가 말하려다 내 눈을 보곤 즉시 다물었다.
첫 시간부터 관심 영역에 들어왔던 소녀라 수업 마치자마자 담임께 여쭈었다. ‘OOOO’이란 애가 어떤 애냐고?' 대뜸 답하시는 말씀,
“아 우리 돛대, 말도 말아요. 얼마나 애먹이는지. 선생님이 처음 이 학교 와서 잘 몰라 그러는데 하여튼 골치 아파요. 아 참 선생님들은 걔 이름을 부르지 않고 다들 돛대라 해요.”
그러고 나서 그 별명을 작년 자기가 지어주었다나. 아마도 소녀의 성씨인 복성(複姓)에서 따온 듯. 특히 담임의 18번 노래가 ‘황포돛대’였다 하니. 나보다 스무 살쯤 많은 담임이 가장 사랑하는 노래 제목을 빌려와 아이의 별명으로 만든 재치는 빛나나 소녀는 황포돛대의 노랫말과는 전혀 달랐다.
한 달쯤 뒤 점심시간에 잠시 밖에 나갔다가 들어올 무렵 저쪽 운동장 한 구석에서 아이들이 웅성웅성 몰려 뭔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가보니 돛대랑 그보다 머리 하나는 훨씬 더 크고 덩치도 제법인 소녀가 머리끄뎅이(표준어 :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우던 참.
하도 처음 보는 광경에 제지 못하고 뜯어말리지 못해 잠시 보던 중 돛대가 덩치 큰 소녀의 허벅지를 발로 계속 차는 게 아닌가. 보통 여자들 싸움은 머리끄댕이를 잡아당기는 싸움일 땐 서로 힘껏 당기려고 애쓰지 상대방 허벅지를 발로 차는 경우는 없다.
오른발로 왼쪽허벅지를 집중공략한 작전 덕(?)이었을까, 덩치 큰 소녀가 그만 돛대의 머리를 놓고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나중에 얘기 들으니 덩치 큰 소녀의 이웃 후배가 돛대에게 맞았단 얘기를 듣고 3학년 선배인 자기가 분노하여 혼내려 왔다가 도로 된통 당한 꼴.
교무실로 담임선생님께 데려갔더니 대뜸 꿀밤을 세게 먹였다. 제법 아팠으련만 그것보다 데려온 나를 꼴쳐보는(표준어 : 노려보다) 눈에 원망이 잔뜩 담겼다. 나중에 담임께 들은 말, 돛대는 머리끄댕이 잡고 당기는 싸움에선 발로 공격하고, 서로 어깨를 붙잡은 상태에선 이마로 상대 얼굴을 그대로 받아버린다나. 그러니 한 번 당한 아이들은 절대 건드리지 않았고, 당연히 소문이 퍼지니 아무도 상대하지 않아 요즘 식으로 하면 '싸움짱'이랄까.
담임선생님에게서 돛대의 영웅적(?) 행위에 관한 다른 얘기도 술술 풀려나왔다. 바로 남의 도시락 몰래 먹기. 이동수업하는 체육ㆍ가정시간이면 종치기 한참 전에 몰래 빠져나와 급우 도시락을 재빨리 먹어치운다나. 먹성이 좋아선지 어떤 땐 두 명 것도. 처음에는 생활이 어려워 도시락 싸줄 형편이 안 돼 그러는가 했더니 그게 아니란다. 제 도시락은 아침 일찍 먹어버리고 점심땐 친구 걸 노린다나.
돛대에 관한 일화 가운데 가장 으뜸(?)은 시험을 앞두고서다. 소녀는 단 한 번도 문제지를 읽어보고 마킹하지 않았다. 그럼? 문제지를 받으면 일단 책상 속에 쑤셔 넣곤 답안지만 꺼낸다. 답안지만 뚫어지게 이십여 분 보다가 그때부터 자기 마음에 드는 숫자를 적는다. 단 한 번도 같은 숫자를 적지 않고 다른 숫자를 적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2학년이 대략 700명쯤(당시 한 학급에 70명가량) 되었는데 500등 후반에서 600등 초반에 이르는 석차가 나왔다. 문제를 한 번도 보지 않고 답란에 적은 돛대 뒤에 거의 100명 정도 처진 애들이 있다는 사실에 선생님들은 모두 혀를 내둘렀다.
허나 돛대에 얽힌 시험 에피소드의 압권은 ‘박정희 대통령’이다.
사회 담당인 담임선생님이 돛대가 하도 문제지를 읽지 않고 답만 쓰자 꾀를 내 객관식 대신 모두 주관식으로 대체했던가 보다. 그러면 아예 하나도 쓰지 않거나, 쓴다면 노래 가사나 적당히 쓰겠지 했는데 웬걸, 그 답안지에 유일하게 답 하나가 적혔다.
"문제 11 : 북한 공산당 우두머리는?"
답으로 ‘김일성’ 하고 적거나 비워 뒀으면 되었는데, 다른 문제엔 답을 적지 않던 돛대가 이 문제에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적었다. ‘박정희’로. 담임선생님이 시험 끝나고 조용히 돛대를 불렀다. 선생님은 이미 배우가 되기로 작정한 양. 소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교무실로 와 무릎을 꿇었다. 무슨 잘못이 있어 불렀겠지 하며 늘 자동(?)으로 취하는 자세로.
담임은 눈물이 글썽글썽한 얼굴을 만들어 돛대를 보며 말했다.
“돛대야... 이제 ... 너랑 나랑... 네 아빠랑 네 엄마랑... 다 경찰서에 잡혀... 가게 되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듣게 된 소녀가 ‘에이 우리 선생님이 또 거짓말하네.’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답지를 꺼내 보여주면서 말했다.
“돛대야, 북한 공산당 우두머리가 누구냐는 물음에 김일성 하고 답해야 하는데 네가 위대한 우리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이름을 썼잖아.”
그때까지도 소녀는 무슨 뜻인지 몰라 담임만 올려다보고...
“어떻게 훌륭하신 박정희 대통령이 공산주의자란 말이냐. 이제 형사가 학교에 와 선생님을 잡아가고... 네 아빠를... 네 엄마를... 그리고 너도 잡혀가게 되었다.”
“예???”
담임은 나에게 눈짓하고는,
“국어선생님께 여쭤봐라. 내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
돛대의 눈이 이쪽으로 향했다. 나도 연기력을 보여야 할 판. 울먹이는 음성으로,
“돛대야... 네 담임선생님의 말씀이 옳다. 아니 나중에 나도 잡혀갈지 모르겠다. 학생 하나 잘못 가르쳤다고 교장선생님도 교감선생님도... 다...”
여기까지 말하자, 주변 선생님들이 다 거드셨다.
“돛대야, 가정선생인 나도...”
“돛대야, 음악선생인 나도...”
“영어 선생인 나도...”
그제사 놀란 토끼눈이 된 소녀가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담임선생님의 바지를 붙잡고 늘어졌다.
“선생님 답안지 찢어주세요. 제발 찢어주세요. 무슨 말씀이든지 다 들을께요. 제발...”
돛대의 생명줄(?)을 쥐게 된 담임의 벌칙을 간단히 정리한다.
. 절대로 남과 싸우지 않는다.
. 친구들이 공부할 때 훼방놓지 않는다.
. 친구의 도시락을 몰래 훔쳐먹지 않는다.
. 날마다 아침 일찍 와 교실 청소를 한다.
그 뒤 돛대가 위 내용을 어길라치면 교무실로 불려와선 아래와 같은 '돛대야’로 시작하는 담임 '염불송'을 들어야 했다.
“돛대야... 이제 ... 너랑 나랑... 네 아빠랑 엄마랑... 다 경찰서에 잡혀... 가게 되었다.”
그때 소녀들의 나이를 대충 계산해 보니 올해가 환갑인 해인 듯하다. 수많은 어여쁜 소녀들과 함께 기억 보따리의 한 켠을 차지한 '돛대', 지금은 어디서 뭘 하며 살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