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일흔에 풀어놓는 소소한 이야기(제18편)
전에 이런 실험 장면을 TV에서 본 적 있다. 똑같은 양파 모종 100개를 두 군데 나누어 심은 뒤 한쪽엔 아주 조용한 클래식 음악을, 다른 한쪽엔 자동차나 비행기의 소음을 틀어준 뒤 그 관찰 결과를 보여주는 실험.
이미 이런 얘기를 들었을 테니 그냥 결과부터 얘기하자. 놀랍게도 클래식 음악을 들려준 곳은 한두 개만 이상이 생겼을 뿐인데, 소음을 들려준 곳은 반 넘게 이상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클래식 음악 쪽보다 훨씬 발육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를 통해 식물도 정서에 감응(感應)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지지난 주 사흘간 풀을 뽑았다. 월요일엔 텃밭, 화요일엔 잔디밭, 수요일엔 언덕 위의 풀... 이런 식으로 잡초를 제거했다. 원래는 날마다 대충 뽑다가 보름에 한 번쯤 왕창 뽑아줘야 했으나 게으른 탓으로 한 달이나 지나 처음 뽑았으니...
그리고 지난주부터 이번 주까지 이러저러한 일들로 하여 집을 비운 적 많아 어제야 겨우 밭에 나가 전에 뽑아놓은 잡초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예상대로였다. 몇 년째 풀을 뽑으면 뿌리를 탈탈 턴 뒤 마당 한가운데의 바위 위나 마른 땅에 그냥 널어둔다.
뿌리를 털지 않으면 거기 붙은 흙만으로 며칠 버틸 수 있고, 게다가 비라도 내리면 흙에 바로 뿌리를 내린다. 그래서 가능한 바위 위에 둔다. 예상대로라면… 보름이나 지났으니 다 죽었어야 했다. 그런데도 군데군데 몇 개씩 살아 있었다. 무더기 무더기 말라비틀어진 풀 사이로 몇 녀석이 정말 살아 있었다. 마땅히 죽어 이제 거름이 되어야 할 녀석들이 아닌가. 그들의 숫자는 적으나 분명히 살아 있었다. 그걸 보며 ‘역시…’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엉뚱한 발상을 한 게 작년 봄이었다. 몇 년 동안 그런 일이 잦다 보니 다음에는 절대로 한 녀석도 살려두지 않겠다고 하여 살 수 있는 환경을 없앴다. 흙을 탈탈 털어 바위 위에 던져놓았다. 그런데도 살아 있다니… 발상은 이렇다.
풀이 자라는데 꼭 필요한 두 가지는 물과 흙이다. 작년 봄에 뽑아내고 한 달 지난 뒤 살펴보았다. 그동안 비가 두어 번 왔으니 물은 충분하였다. 아니다. 뽑아내고 난 뒤 일주일 동안은 비 한 방울 오지 않고 햇빛만 쨍쨍 내리비쳤으니 충분치 않았다. 게다가 흙도 다 털어냈으니 살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살아났다?
내가 주목한 건 바로 이 점이다. 살아난 잡초 밑을 들어보았다. 함께 뽑아놓았던 풀들은 이미 적당히 썩어 거름이 돼 있었다.
‘이것이다.’
거름으로 돼 있다는 말은 흙으로서의 구실을 한다는 말이고, 비가 오지 않고 이슬만 내려도 물기를 충분히 흡수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가설 하나를 세웠다. 풀을 뽑아 밭에 버려놓으면 저절로 썩는다. 그게 거름이 되어 땅을 기름지게 한다. 이것이 자연 순환의 이치다. 허나 그런 과정이 그리 빨리 이뤄지지 않는다. 적어도 몇 달은 걸려야 한다.
가설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약 풀들이 뽑힌 상태에서 서로 다 살려고 발버둥 친다면 몽땅 다 죽을 수밖에 없다. 먼저 죽어 썩는 풀이 없다면 하나도 살 수 없다. 헌데 만약 녀석들 가운데 일부라도 의도적으로 빨리 죽어준다면 소수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생기지 않을까.
죽으면 마르고, 마르면 물기 흡수력이 좋아져 부패가 빨리 진행된다. 빨리 썩으면 거름으로, 또 습기를 충분히 머금을 수 있는 스펀지처럼 되니 몇몇은 살 수 있다. 즉 대다수의 풀이 희생함으로써 몇몇이라도 자기 종족은 살아남는다.
물론 이런 말을 하면 당장 이런 반론이 튀어나오리라. 살아남은 녀석들은 나의 '개똥 가설'과는 상관없이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고. 또는 다른 녀석들보다 흙이 덜 털렸거나, 물을 빨아들이지 않더라도 버티는 능력이 다른 녀석들보다 월등한 종자가 아니냐고.
동물이 자기 새끼나 종족을 위해 희생하는 예는 이미 많이 알려졌다. 한 지역에 먹잇감보다 자기들 개체수가 많으면 새끼를 적게 낳거나 낳더라도 물어 죽여 버린다. 이런 현상이 동물에게만 적용되고, 식물에겐 적용 안 된다? 즉 식물이 자기 종족을 위해 희생한다는 가설은 전혀 얼토당토않을까. 이미 식물도 정서에 감응하는 게 증명된 바 있는데도 말이다. (혹 이미 '식물의 희생 이론'이 나와 있는지 모르겠다만.)
물론 아니어도 괜찮다. 이런 발상을 하면서 일을 하면 지겹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엉뚱한 발상이 정작 필요한 젊은 시절엔 나지 않고 이제야 나는 게 후회스러운 뿐. 만약 한 20년 전이라도 발상의 영역에 발 디뎠다면 뭔가 굉장한(?) 걸 발견하거나 발명했을지도… 그래서 내 이름이 뉴스의 한 토막을 장식했을지도...
이 나이에 자꾸 엉뚱한 발상을 하는 건 한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매임’에서 ‘풀림’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은퇴 후 시간이 남다 보니 전엔 지나쳤던 일에 오래도록 시선이 머문다. 쫓기지 않는 삶이 가져다준 혜택의 하나다. 엉뚱한 발상은 확실히 ‘매어 있을 때’보다 ‘풀려 있을 때’ 튀어나온다. 쫓기는 생활에서는 되려 들어가 버린다.
엉뚱한 발상은 바로 창의력의 밑거름 아닌가. 우리나라 아이들은 시험을 치면 세계에서 1, 2위를 다툴 게다. 헌데 창의력 면에서는 매우 뒤진다. 그러다 보니 ‘창의력 신장 교육’이니 하는 글귀가 대부분의 교육청 정문에 붙어 있다. 관계 공문도 짬 없이 내려오고 결과 보고도 해야 한다.
이러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일도 숱하게 나온다. 하도 창의력을 강조하다 보니 창의력 키우는 방법을 가르치는 학원도 성황이라는 얘기다. 창의력 키우는 일을 영어 수학처럼 학원 수업을 통해 가르친다? 어쩌면 국가 수준의 창의력 기능검정시험이라도 생겨날지 모른다. 그래서 1급 2급 매기게 될지도...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아이들을 꽉 조아 매어놓고 어떻게 엉뚱한 발상을 기대할 것인가. 학교 수업 끝나면 우리 아이들은 더 바빠진다. 학원에 가 영ㆍ수ㆍ국에다 사회ㆍ과학도 공부해야 하고, 집에 오면 눈높이수학, 튼튼영어, 씽크빅국어, 장원한자 등의 학습지도 풀어야 한다. 창의력은 개똥. 기를 시간이 전혀 없는데...
창의력을 키우는 가장 확실한 길은 ‘풀어줌’에 있다. 스스로 생각하고 깨칠 시간을 위해 풀어주고 또 풀어줘야 한다. 관찰하고 융합할 시간을 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