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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엄마의 세 가지 거짓말

나이 일흔에 풀어놓는 소소한 이야기(제16편)

* 울엄마의 세 가지 거짓말 *



나 어릴 때 울엄마는 육류든 어류든 고기를 먹지 못했다. 생선은 비린내 난다고, 소 돼지는 기름기가 속에 받지 않아 탈난다고. 그래서 일 년에 한두 번씩 밥상에 올라오는 고기는 아버지, 나, 동생 이렇게 셋의 차지였다. 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발령받은 학교에서 탄 첫 월급을 송두리째 갖다드렸을 때, 다음날 저녁 밥상에는 돼지 삼겹살이 올랐다.

돼지 삼겹살!

내 기억 속에 그 전까지 집에서 고기를 구워 먹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그날 울엄마는 지금처럼 편리한 가스레인지와 불판이 없는데도 철사로 얼기설기 엮은 임시 석쇠 위에서 아주 능숙하게 고기를 구워 파절이기와 상추와 소금 친 참기름 종지를 함께 내놓았다.




그러자 아버지와 동생은 구워진 고기를 자신의 힘으로 상추에 싸서 먹었고, 나도 그러려고 하는데 당신이 직접 고기와 파절이를 상추에 싸서는 한입 가득 넣어주었다. 그런 뒤 다시 한 쌈을 조그맣게 싸시기에 이번에는 동생에게 주려나 하고 여기면서 동생 쪽을 보니 그도 기대가 찬 눈길이었다. 그러나 웬걸 고기는 엄마의 입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순간 나와 동생은 합창이나 하듯 소리쳤다.

"아 엄마, 고기 못 먹잖아. 먹으면 탈 난다면서."

"내 아들이 한 달 동안 욕봐 벌어온 돈으로 산 음식인데 멀 묵어도 우찌 탈나겄노?"

말은 그리 하면서도 그날 엄마가 아주 능숙하게(?) 고기쌈을 몇 입 더 먹는 모습이 지워지지 않았다.


다음날 학교 갔다 오면서 어물전에 들러 물고기 중 비린내가 유달리 심한 갈치 두 마리를 샀다. 그리고 저녁에 구워달라고 했다. 밥상에는 갈치가 올랐고, 나는 고기 가운데 젓가락을 넣어 오동통한 살 부분만 발라내 엄마의 입으로 향했다. 그러자 당신은 내 예측대로 입을 냉큼 벌렸다. 그때 나보다 네 살 어린 동생은 또 한 번 철이 덜 든 소리를 했다.

"엄마, 비린내 나는 건 못 먹는다고 했잖아 … "

그러나 울엄마는 못 들은 체 맛을 음미하듯 한참을 우물거렸다.




울엄마의 두 번째 거짓말은 김치국밥이다.


나는 먹는 걸 가리지 않아 아무거나 잘 먹는 편이다. 그러나 단 한 가지 김치국밥만은 절대로 먹지 않는다. 결혼 후 삼 년이 되던 해였다. 제법 된바람이 불어오던 어느 일요일, 아내가 송송 썬 파와 달걀을 듬뿍 푼 데다가 돼지고기 몇 모타리가 동동 떠 있는 이름 모를 음식을 내놓았다.

국물도 뻘겋게 물들어 맵싸한 음식을 좋아하던 내 입에선 저절로 군침이 돌아, 먹으려고 숟가락을 한 번 휘저었다. 순간 김치가 떠오르는 게 아닌가. 그냥 밥숟가락을 내동댕이쳤다.

어느 때부터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으나 겨울방학 40여 일 동안 울엄마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김치국밥을 끓였다. 점심은 물론이고 저녁도 김치국밥이었다. 심지어 저녁때 많이 남으면 그걸 처리하기 위하여 아침도 김치국밥일 때가 종종 있었다. 날마다 나와 말싸움이 이어졌다.




"엄마, 제발 김치국밥 좀 끓이지 마라. 이제 신물이 난다. 우리도 밥 좀 묵자."

"야 이넘아, 이적부터 우리 조선사램한테는 김치국뱁이 몸에 최고라캤어."

그러면 나는 어느 시대 어느 사람이 그런 말을 했느냐고 따졌다.

"공재 맹재 다 높은 양반들이 그래샀어, 참말로 얄궂다. 니 책에선 고런 이바구가 안 나오더나?"

아무리 내가 당신보다 유식한 걸 무기삼아 공자나 맹자가 그런 말을 어느 책에서든 한 적이 없다고 해도 울엄마는 막무가내였다. 김치국밥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우리나라 사람에게 가장 좋은 음식이라는 주장을 절대로 굽히지 않았다.

그러던 게 우리 형편이 조금 나아지면서 국밥의 횟수가 줄어들더니 내가 직업을 갖고부터는 아예 없어졌는데, 그 뒤로도 몇 년이 지날 때까지 나는 그 속내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당시 우리 집은 산동네로 들어서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서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다. 그때 내가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한 건 꼭 한 아주머니 - 아이가 다섯이나 딸린 과수댁 -만은 식사 때가 되면 우리 집을 찾아오는 거였다. 특별한 볼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찾아와서는 밥을 풀 때까지 실속 없는 얘길 주고받다가 울엄마가 밥상을 들여가면서,

"밥 안 묵었제? 같이 묵자." 하고 말을 건네면 그제사,

"묵고 왔어요." 하고 대답한다.

다시 울엄마는,

"그라도 같이 묵자."

이번에는 아주머니의 음성이 약간 바뀌며,

"묵고 왔는데 …" 하면서 상 앞으로 슬쩍 다가앉는다. 그러면 울엄마는 당신의 밥그릇 - 거의 누룽지에 그것도 반을 채웠을까 - 에서 반을 덜어내 준다. 그럴 때면 나와 동생은 오만상을 다 찡그린다. 우리 그릇에 있는 밥 몇 숟가락이 저쪽으로 넘겨져야 할 역할이 남아서였다.


이제 생각해보면 김치국밥이 주식이 된 때는 다음해 가을쯤 우리 집에 그 아주머니 말고 또 한 사람 - 자식 없이 혼자 살던 이웃 할머니 - 이 더 늘어나면서부터였다고 생각된다. 사실 김치국밥은 김치만 적절히 조절하면 밥 한 그릇으로 두 그릇을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고, 거기다 물까지 더해지면 한 그릇 더해 세 그릇 만들어냄도 일 아니다.


([매일신문] 2020.8.8)



세 번째 거짓말은 둘째 누나 때문이다.


누나는 아버지 표현대로 하자면 '싹수는 당체 뵈지 않고 예편네 욕만 잔뜩 믹일' 남자를 사랑한 게 탈이었다. 아버지가 한 번만 더 만나면 '다리몽댕이 뿔라삔다'고 했으나 누나는 다리몽댕이 부러지기가 겁나선지 그 남자를 따라 집을 나가버렸다. 누나의 옷 보따리가 없어진 걸 가장 먼저 발견한 울엄마는,

"지 년이 부모 말 안 듣고 나가 잘 사는가 보자. 오냐 이년아,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즈을대로 니 년 꼬라지 안 볼 끼다!"

없는 누나를 향해 아버지보다 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아버지의 소리가 저절로 잦아들었다.

그날 밤 소변이 마려워 통시로 가려는데 어디서 훌쩍이는 소리가 나 정지(*부엌)에 몰래 가보았더니 울엄마였다.

"누나 때문이지?"

"미칬나, 나가 와 지 년 때문에 울 끼고. 내사 안 운다. 즈을대로 안 운다."

그날 얼마나 울었는지 솔직히 난 모른다. 오줌 누고 와서 이내 잠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다음날 아침 부엉이눈보다 더 퉁퉁 부은 울엄마의 눈을 보았을 따름이다.




8년 전, 중풍과 치매를 동시에 안은 울엄마는 변했다. 그러자 가까운 친지나 동네 사람들로부터 '보살할매'라 칭송받던 울엄마는 자식들조차 멀리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아마 나는 현실 속의 모습이 보기 싫어 자꾸만 옛날을 되새기는가 보다.

어떤 때는 하루에 밥을 열 번도 더 달라했다가, 어떤 때는 앞집의 누구 엄마, 뒷집의 누구 엄마가 차려주었다며 먹지 않으려 한다. 아내 아니면 차려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알기에 뭐든 들게 하려고 하루는,

"김치국밥 만들어 줄까?" 하고 슬쩍 운을 떼었다.

"이넘아, 김치국밥은 엉걸징사가 난다. (*어지간히 진절머리가 난다)"


혼자 있을 때가 많다보니 울엄마는 수많은 인물을 만들어낸다. 그중의 한 인물이 준필이다. 준필은 울엄마가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둘째누나의 아들이다.

"준필(실제로는 둘째누나를 가리킴)이는 와 안 오노?"

"저번 주에 왔다 갔잖아요."

"은제 왔다 갔노. 지 에미가 보기 싫어서 안 오는 년. 코빼기도 안 보이는 나쁜 년."

둘째누나는 시간을 내기 어려운 가운데서도 매주 꼬박꼬박 다녀갔다. 가장 얼굴을 많이 비치는데도 늘 못 봤다고 했다.


오늘 저녁 급한 만남이 생겨 나 먼저 먹으라고 아내가 상을 차려 내놓는데 갑자기,

"니만 고기 묵고 난 안 주나. 애미 박대하면 천벌 받을끼다."

무슨 소린가 싶어 아내를 쳐다봤더니, 아내도 고개를 저었다.

"언제 나만 고기 먹었다고 그래요?"

"아까 니 상에 있대. 엉가이(*어지간히) 씹어 샀더니."

순간 나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황토빛 도는 미역귀다리를 초장에 찍어먹는 걸 멀리서 보는 바람에 갈비를 뜯는 걸로 착각한 것이리라.




나는 요즘 건강진단의 전도사가 되었다.

“나이 많으신 부모님을 모시고 있거나, 나중에 모시게 될 처지에 있는 사람이 가장 우선해야 할 일은 정기적으로 병원에 모셔가 건강진단을 받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사람을 만나거나 얘기할 자리가 주어지면 서슴없이 전도한다. 그리고 또 몇 마디 덧붙인다.

“지금 건강하다고 앞으로도 건강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탈나기 전의 우리 어머니는 일흔다섯의 나이가 무색하게 혼자서 무엇이든 다 하셨습니다. 부산에서 방어진의 우리 집까지 하루에 두 번씩이나 왔다 갔다 한 적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신경 쓰십시오. 저처럼 후회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추억을 잃고, 사랑을 잃고, 어머니를 잃기 전에 말입니다.”


*. 오늘 글은 '목우씨의 일기장(2002년 5월 27일)'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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