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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와 어릿광대

나이 일흔에 풀어놓는 소소한 이야기(제14편)

* 아가와 어릿광대 *



몇 년 전 어느 날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부산으로 갔다. 생각 같았으면 밤샘을 하고 싶었지만 다음 날 일이 있어 어쩔 수 없이 올라와야 했다. 그래도 제법 늦게까지 남아 있던 바람에 정류소에 갔을 때는 심야버스만 있어 12시 30분발 울산행 시외버스에 올랐다.

내가 차지한 좌석은 운전기사 뒤 두 번째 줄이었다. 피로한 데다 술까지 마신 몸이라 저절로 고개가 젖혀졌다. 이 정도면 출발하자마자 곯아떨어질 테고 중간에 내리지 않아도 되니 종점에 도착하여 일어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막 잠들려 할 때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고개를 돌려보니 옆자리였다. 내가 탈 때는 없었으니 아마도 뒤에 탄 모양이었다. 삼십 대 초반쯤 돼 보이는 여자가 한 자리를 잡았고, 그 옆에 네댓 살쯤 되는 사내아이가 잠들어 있었는데 소리는 그 애가 내는 게 아니었다.

그래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보니 바로 여자가 안고 있는 돌이 아직 안 된 아기였다. 바로 아기가 칭얼거리는 소리였다. 아기 엄마의 어르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잠을 청했다. 허나 뭐가 못마땅한지 어디가 불편한지 제 엄마가 어르는 소리에도 자꾸만 칭얼대는 게 아닌가.




다들 늦은 시간이라 잠을 자느라 눈을 감고 있는데 아기가 칭얼거리니 엄마는 당황하였고, 아이의 입을 막느라 가슴으로 당겨 안는 바람에 숨이 막혀선지 더욱 소리가 높아지면서 주변에서 짜증 섞인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녀석 참, 엄마 애먹이네.” 하는 말은 점잖다고 보면, 어떤 아저씨는 술 취한 음성으로 “아 씨, 뭐야!” 하는 욕에 가까운 소리조차 내뱉었다. 아기 엄마는 더욱 당황했고, 아기는 그에 따라 칭얼거림에서 울음으로 바꾸었다. 나도 짜증이 났다. 아기가 제발 울음을 그치고 조용히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지만 그건 정말 바람뿐.

마침내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아기는 그제서야 그쳤다. 그러나 한 손으로 아기를 안고 또 다른 한 손으론 손잡이를 잡은 채 시속 100km 가까운 속도를 내며 달리는 버스에 오래 서 있기가 힘들어 앉을라치면 다시 울어, 엄마는 아기와 앉았다 섰다를 계속 반복해야만 했다.


그럴 즈음 나도 잠이 다 달아났다. 그래 녀석이 괘씸하여 위를 올려다보았는데 초롱초롱한 눈과 마주치는 순간 괘씸함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온통 귀여움만 들어왔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내 볼에 바람을 넣어 볼록하게 만들어보았다.

아기의 시선은 즉각 내게로 꽂혔다. 이번에는 바람을 빼 오므렸다가 다시 볼록하게 만들었다. 아기의 눈에 설핏 웃음이 맴도는 게 보였다. 됐다. 다시 몇 번 반복하자 이제 웃음이 뚜렷했다. 조금만 더 아기의 시선을 잡을 수 있다면... 그때부터 그 우스꽝스러운 짓을 계속했다.


(구글 이미지에서)



그런데 다시 문제가 생겼다.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가 졸음이 오는지 고개가 자꾸만 아래로 떨어지고 팔도 아래로 처지는 게 아닌가. 위태로웠다. 그러나 지금 자리에 앉으면 아기는 울 테고…. 그때부터 나는 필사적이었다. 볼을 오목볼록하게 하는 행위에는 아기가 식상한 것 같아 이번에는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이어 혀를 내밀어 상하좌우로 돌렸다. 아기의 눈은 분명히 내게 고정돼 있었다. 졸고 있는 엄마와 상관없이 아기의 눈길은 오직 내게로 향해 있었다.

이제 어느 정도 자신감이 들었다. 아기 엄마를 불러 앉게 했다. 얼마나 피곤했는지 엄마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내가 어떤 의도로 한 말인지 새길 겨를 없이 아기를 안은 채 그대로 주저앉더니만 이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때 아기의 입에 울음이 맺히는 게 보였다. 또다시 위기였다. 5초 안에 잡지 못하면 울게 되고, 그러면 승객들이…, 또 아기 엄마가… 비장의 무기를 선보여야 했다. 순간 기억의 바구니에 담아둔 채 좀처럼 써먹지 않던 표정 연기가 떠올랐다.

이십여 년 전인가 한 코미디언이 선보인 원숭이 연기였다. 왼손으로 얼굴을 쓰다듬듯이 위에서 아래로 두 번 훑은 뒤 턱을 잡으면, 오른손으로는 볼을 슬쩍슬쩍 긁는 그 표정이 하도 우스워 몇 번 흉내 낸 적이 있어 기억하는 흉내내기다.




갑자기 그게 떠오른 건 도무지 알 수 없지만, 헌데 효과가 대만족이었다. 아기의 입에 울음이 가시고 대신 ‘까르륵’ 하는 소리가 나오는 게 아닌가.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분명 웃음소리였다. ‘됐다.’ 이제 아기는 내 손안에 들어온 것이다.

그때부터 아기와 나는 한 시간 가까운 놀이를 즐겼다. 아니 놀이가 아니라 공연이었다. 나는 광대가 되고 아기는 관객이 된. 그러나 이 공연에는 말 못할 아픔이 따랐다. 아무리 멋지게 공연해도 관객에게서 한 푼도 받지 못하지만 만약 잘못하여 관객이 울음을 터뜨린다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점.


종점에 도착할 때까지 어릿광대의 공연은 이어졌다. 관객은 계속 앙코르를 요청했고 광대는 그에 맞게 열과 성을 다하였다. 차가 완전히 멎고서야 아기 엄마도 잠에서 깨어났고 승객들도 잠에서 깨었다. 그동안 차 안에서 한 시간 남짓 한 어릿광대의 처절한 공연이 있었다는 걸 아무도 모른 채.




아기 엄마가 아기를 안아 업었다. 먼저 내리도록 한 뒤 곁을 지나치는 아기의 볼을 살짝 꼬집어주었다. 그리고 차에 내려 저만치 멀어져 가는 아기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때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기도 나를 향하여 손을 흔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 오늘 글은 목우씨의 일기장(2009년 10월 5일)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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