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일흔에 풀어놓는 소소한 이야기(제12편)
여행 길잡이를 자처한 터라 누군가 부탁하면 특별한 일 없으면 들어준다. 그런데 부탁하는 사람들이 똑같지 않다 보니 가는 곳을 또 가게 된다.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부탁하는 이들이 같은 곳을 여러 번 가게 됐다며 미안해한다.
그러나 아니다. 어제 보고 오늘 봐도 새롭다. 류시화 시인의 시 제목을 빌리자면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라는 표현 그대로다. 가끔씩 가도 가도 가고 싶은 곳이 있기 마련이다. 그 가운데 한 곳이 흥덕왕릉. 이곳을 찾아감은 경치가 좋아서도 아니요, 역사적 유물이 있어서도 아니다. 거기서 가르침을 얻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갈 때마다 다르게 다가온다.
흥덕왕릉은 경주시 안강읍에 위치하는데, 흥덕왕 자체가 그리 알려진 임금이 아니다 보니 볼거리는 별로 없다. 다만 한 가지 덧붙이자면 아내를 너무나도 사랑한 왕이었다고 한다. 왕위를 이어받은 지 두 달만에 왕비가 죽자 신하들이 새로 왕비를 맞이할 것을 청했는데 흥덕왕은 이렇게 대답했다.
“새도 제 짝을 잃으면 슬퍼하거늘, 어찌 사람이 사랑하는 배필을 잃었는데 차마 새 장가를 들겠소?”
그 뒤 왕은 새로 왕비를 맞이하지 않음은 물론 곁의 궁녀들조차도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하니….
이 에피소드만으로 글을 쓸 수 있지만 내 관심은 흥덕왕에게가 아니라 흥덕왕릉, 아니 좀 더 확실히 하면 왕릉 앞에 있는 '소나무'에 있다.
‘흥덕왕릉 앞의 소나무?’
가 본 사람이나 앞으로 가 볼 사람에게 해 줄 말은 그곳 소나무는 다른 곳의 소나무와 차이가 난다. 똑바로 솟은 나무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다들 휘어지고 구부러져 있다. 그리 말하면 이렇게 답할 수 있으리라. 경주의 소나무는 대체로 굽어지고 휘어져 있다고.
맞는 말이다. 그럼에도 흥덕왕릉을 두른 소나무는 유별나다. 마치 분재를 키울 때 일부러 전지가위로 다듬거나 철사로 묶어 휘어지도록 하여 나무 모양을 잡아간 것처럼, 누가 일부러 그리 자라도록 강제로 다듬어놓은 것 같다. 정말 그랬을까? 결론은 아니다. 저가 알아서 그리된 것이다.
소나무 스스로 알아서 휘어지고 뒤틀어지고 구부러졌다고? 학명(學名)은 없으나 경주 사람들 가운데 귀 밝은 이들만 아는 소나무 이름에 ‘안강목 (安康木)’이 있다. (흥덕왕릉이 자리한 곳이 '경주시 안강읍')
안강목은 경주 곳곳에 자라는데 특히 삼릉과 흥덕왕릉 주변이 유명하다. 쭉쭉 뻗은 소나무를 보다가 이렇게 휘어지고 뒤틀어지고 구부러진 소나무를 보면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리라.
이 소나무들이 이렇게 된 원인으로 여러 가지 말이 나오는데 그 가운데 하나로 여기 사시는 어른들의 말을 옮기면 이곳 소나무들도 아주 오래전에는 곧았다고 한다. 헌데 곧은 소나무들은 집짓기 위해서나 살림에 필요한 여러 집기를 만들기 위해 잘려나갔다.
곧게 뻗으면 잘려나가다 보니 안강의 소나무들은 살아남기 위한 본능으로 뿌리에서부터 올라오면서 곧은 상태가 아니라 휘어진 상태로 올라왔다. 그러니 나중에 컸을 때도 그렇고. 그래서 얻은 이름이 '안강'이란 지명을 따서 ‘안강목’이 되었다. 따라서 ‘안강목’에는 단순히 안강에서 나는 소나무란 뜻만 담김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뒤틀어진 소나무라는 의미도 포함된다.
구부러지고 뒤틀어지고 휘어진 소나무를 솜솜히 뜯어보면 그 나름의 운치가 있다. 만약 그대로 축소한다면 분재하는 이들이 탐을 냄 직할만큼 수형(樹形)이다. 게다가 한 눈에도 쭉 뻗은 소나무가 좀은 정적(靜的)이라면 적당한 휘어진 소나무는 동적(動的)이라 훨씬 생동감이 더 느껴진다. 뿐이랴, 바람이 불 때 나뭇가지가 하늘하늘 춤추는 모습은 마치 고전무용수가 '승무' 출 때 긴소매를 내어 휘젓는 모습을 보는 양 정말 아름답다.
요즘 주로 읽는 책이 [노자도덕경]이다. 이 책도 읽을 때마다 다른 깨달음을 준다. 제22장 첫머리에 나오는 ‘곡즉전(曲則全 ; 구부리면 온전해지고)’만 해도 그렇다. 원래 제자백가의 글은 여러 갈래로 해석이 가능하다. 따라서 ‘곡즉전(曲則全)’도 수많은 이들이 나름의 해석을 내놓았다.
어떤 이는 '구부려야(복종해야 할) 때 구부려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라고 하고, 다른 이는 '몸과 마음의 구부림이 자유로울 정도로 유연해야 장수할 수 있다'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무리 가운데 (곧지 않고) 휘어져야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라고 한다.
세 번째 해석을 따르면 속담 가운데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가 떠오르리라. 선산에 심은 나무 중 곧게 쭉쭉 뻗은 나무는 목재로 가구 재료로 다 잘려나가고, 안강목처럼 굽어져 도무지 쓸모없는 나무만 남는다. 바로 그 굽은 나무들만이 오래 살다 보니 선산을 지킨다는 뜻이다.
혹 마을 입구 성황당 곁에 선 당산나무를 유심히 본 적 있다면 이때쯤 ‘아, 맞다.’ 하고 무릎을 치는 이가 있을 게다. 당산나무치고 똑바로 곧게 쭉 뻗은 나무는 없으니까. 다들 휘어지고, 굽어지고, 비틀어지고, 가지마저 넌출져 있다. 그 까닭도 안강목이나 선산을 지키는 나무나 마찬가지다. 수백 년 살아남으려면 그 방법이 최고니까.
요즘 들어선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는 류의 해석보단 '쓸모없이 버려진(기억하는 이 없이 잊혀진) 존재가 실제로 그가 속한 사회를 지킨다'라는 뜻으로 해석해 본다.
졸업한 뒤 학교를 찾아오는 제자들은 대개 두 부류다. 한 부류는 짐작하다시피 공부로 출세한(아니면 명문대 합격한) 제자이며, 또 다른 부류는 학교 다닐 때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졸업한 뒤 제 길을 찾아 성공한 제자다.
앞의 제자들은 한두 번 찾아오고는 다시 오지 않는다. 이미 자기 소임(자랑)을 다했기 때문에. 허지만 두 번째 해당하는 제자들은 꾸준히 찾아오거나, 아니면 특정 선생님과 연락하여 계속 소식을 전한다. 그리고 이 제자들이 학교에 실질적인 많은 도움을 준다.
분명히 공부 잘하여 성공한 제자들은 누구보다도 학교의 덕을 많이 입었다. 장학금을 탔든지 아니면 선생님들의 사랑을 그렇지 않은 애들보다 훨씬 많이 받았다. 그에 비하면 다닐 때 눈에 띄지 않던 제자들은 상대적으로 혜택을 덜 받았다. 그럼에도 학교와 스승에 대한 사랑은 더 강하다.
역사서에선 큰 업적을 남긴 이들의 이름만 돋보인다. 허나 이름 없이 한 송이 들꽃으로 피었다가 사라진, 다른 이들의 관심 밖의 존재인 민초들이 사회와 국가를 이끌어왔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또 온 집안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하면서 자란 3대 독자 귀남(貴男)이보다, 있는지 없는지 관심 밖에 자란 개똥이 소똥이가 나중에 집안의 기둥이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세상은 늘 위태위태하지만 어깨 힘주고 사는 이들보다 덜 주목받는, 관심 밖에 있는 사람들 때문에 쉬 무너지지 않는다. 언제나 어리석은 사람이 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 비록 굽어지고 휘어지고 뒤틀어진 상태라도 그들이 있어 세상은 살맛이 나는 게 아닌가.
짬을 내 흥덕왕릉에 꼭 한번 다녀오시기를. 뭔지 몰라도 가슴을 찌르르 울리며 다가오는 감흥이 있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