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일흔에 풀어놓는 소소한 이야기(제11편)
<하나 : 버려진 비닐봉지>
요즘은 쓰레기 분리수거가 잘 되어 시장에서 물건 담아오던 비닐봉지를 함부로 버리지 않고 비닐 모으는 장소에 함께 모은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다. 사과 복숭아 자두 담아오던 과일 봉지도, 갈치 몇 마리 담아오던 생선 봉지도, 아버지 막걸리 담아오던 봉지도 용도가 끝나면 다시 쓰거나 그냥 버렸다.
아무렇게나 버려진 까만 비닐봉지는 버려진 자리를 고수하지 않는다. 운 좋게 한 구석에 돌돌 말려 처박혔으면 오래도록 그 자리를 차지했겠지만, 봉지는 비닐이다 보니 바람을 받으면 부력을 얻어 쉬 날아오른다. 그때부터 봉지는 어디든 날아가는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그리하여 봉지는 과거를 잃게 된다. 마치 노래 제목 ‘과거를 묻지 마세요.’ 처럼. 과거가 없는 비닐봉지는 그래서 사연이 만들어진다. 막노동을 마치고 귀갓길에 들른 시장에서 물이 간 고등어 한 손을 넣어왔던 가장이 들었던 그 봉지일 수 있고, 엄마 심부름으로 우유 사러 왔던 예닐곱 살 꼬마가 동생과 함께 먹을 꼬깔콘이랑 마이쭈가 담긴 봉지일 수 있다.
그러기에 지금 저기 어디쯤에서 날아왔는지 알 수 없는 나뭇가지에 걸린 저 파랗고 흰 비닐봉지는 한 번은 누군가를 설레게 했으리라. 아빠의 손에 고등어 한 손보다는 치킨이 들리기를 바랐을지도 모를 아이의 바람이 저 반투명의 비닐봉지에 감춰져 있는지 모른다.
날아가다 운 좋게(?) 나뭇가지에 걸린 봉지는 바람에 잔주름을 접었다 폈다 한다. 아니 춤을 춘다. 그 속에 뭐가 들어 있었던 이제 내장은 다 빠져나가고 허물만 남아 그래서 춤이 더 자연스러운가 보다. 어떤 땐 전위무용가 홍신자처럼 역동적으로, 어떤 땐 승무 기능보유자 이애주의 느릿느릿한 손사위 같기도 하다.
이런저런 춤에 흐르는 고갱이가 자유이듯이 까만 비닐봉지가 추는 춤의 궁극도 자유다. 바람에 출산 직전의 배처럼 불룩 솟았다가, 잠시 방향을 바꾸면 아기 빠진 뒤 홀쭉한 배처럼 쑥 쭈그러드는 모습은 자유가 아니면 만들지 못한다.
<둘 : 쓰레기산이 눈으로 덮이면>
부산 살던 내가 서울 언저리에 있는 ‘난지도’를 알 리 만무. 우연히 ‘난지도 쓰레기산’에 대한 기사를 읽고 그런 곳이 있구나 하는 정도로 끝냈다. 그러다 한 사진작가의 전시회에 들렀다가 눈길 끄는 사진 둘을 보았다. 하나는 ‘난지도 쓰레기산’과 다른 하나는‘쓰레기산에 눈이 내리다’
같은 피사체를 두고 찍었건만 둘의 사진은 전혀 달랐다. 하나는 환경오염의 생태를 극심하게 드러낸 눈 찌푸리게 만드는 고발형이라면, 다른 하나는 아무리 쓰레기라도 예술가가 그걸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아름다운 작품도 될 수 있음을. (불행히도 그때 사진을 구하지 못해 다른 사진을 대체함)
'세상의 온갖 추함과 더러움이 눈으로 덮이다'란 식의 표현을 자주 본다. 눈이 내리면 세상의 더럽고 추한 모습이 모두 눈에 가려져 깨끗해 보인다는 뜻이리라. 그러고 보면 추함과 순백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 아닐까? 환경이나 시각이나 보는 이의 감정에 따라 달라짐을.
일부러 인공호수를 만들고 연꽃을 심어 축제를 여는 지자체가 꽤 된다. 허나 연꽃은 진흙탕 속에서 꽃을 피워야 더욱 아름답듯이, 마구 버려져 아무리 추해도 눈에 덮이면 남다른 기품을 드러내는 쓰레기산이 그래서 생각거리를 준다.
<셋 : 버려진 마네킹>
작년 가을 볼일 보러 부산으로 내려가 도심을 걷다 옷가게 즐비한 곳에 이르러 마네킹이 쓰러져 부서진 채 놓인 장면을 보았다. 쓰레기로 버리려 했는가 본데 종량제 봉투에 넣지 않고 길바닥에 놔뒀으니 오가는 사람들 발에 차여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잠시 걸음을 멈췄다. 요즘 마네킹은 특수 재질로 만들어 잘 부서지지 않는다는데, 저리 박살 난 걸 보니 예전 재질로 만든 구제 마네킹인 듯. 그러니 머리 따로, 몸통 따로, 팔 따로, 다리 따로 완전 해체된 상태. 종량제 봉투에 넣었더라면 사람다운(?) 형상을 유지했으련만.
아쉬움에 돌아서다가 다시 뭔가에 이끌려 거기로 가 자세히 보았다. 산산조각이 난 상태가 아닌 머리 몸통 팔 다리가 따로따로 놓인 상태. 순간 내 눈에는 완전체 못지않게 조화로워 보였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완전 해체된 마네킹이 정상인 마네킹 같은 조화로움을 드러내다니. 고급스럽고 예쁜 옷만 걸친 멋진 마네킹만 보다가 저렇게 버려져 부서진 마네킹도 나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지 않은가. (역시 사진 못 찍어 다른 걸로 대체함)
<넷 : 우리들은>
우리들도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언젠가는 세상에 버려진다. 버려졌을 때 앞의 사물들처럼 기품을 잃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비닐봉지처럼 자유로움을 누리는 존재로, 눈 덮인 쓰레기산이 보여주는 변신의 오묘함으로, 부서진 마네킹처럼 새로운 미의 창조로.
요즘 이형기 시인의 「낙화」를 짬 날 때마다 읊조린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비록 버려져도 그 기품 지닌 채 끝낼 수 있음을 시인은 우리에게 알려준다. ‘아름다운 뒷모습’을 지닌 채 가라고. 오늘도 뉴스 보면 저만큼 살았으면, 저만큼 공부했으면, 저만큼 누렸으면, 저만큼 벌었으면, 뒷모습이 아름답진 않아도 추하진 말았어야 할 군상이 조기 두릅 엮이듯 나온다.
오늘 나는 무심코 걸어가지만 그 뒷모습을 누군가 훔쳐보고 있다면 발걸음을 달리 해야 하지 않을까. 유정(有情)의 인간에게 마구 버려진 무정(無情)의 사물도 나름의 기품을 지녔건만 정작 그들을 버린 우리는 기품을 잃어가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