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일흔에 풀어놓는 소소한 이야기(제15편)
가끔 시를 배우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는 질문을 받는다. 수년째 시 배달을 하고 있으니 시에 대하여 좀 아는 듯싶어 물었으리라. 미리 말하지만 나는 시인이 아니다. 그저 시 읽기를 좋아해 가까이하다 보니 내 마음대로 풀이한 내용을 혼자 품기 아까워 공유할 뿐. 그런 점을 먼저 밝힌 뒤 이렇게 말한다.
“시를 알고 싶으면 먼저 동시를 읽어보세요.”
“예? 애들이나 읽는 동시를요?”
“동시는 발상이 참 뛰어납니다. 동시를 읽으면서 그 톡톡 튀는 발상만 익혀도 시에 대하여 제법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다음 또 이런 질문을 하는 이가 있다. “소설 배우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까요?” 물론 나는 소설가도 아니다. 그래도 질문을 받았으니 잔뜩 기대하는 모습에 모른다고 하기엔 그렇고 하여 이리 답했다. “동화부터 읽으셔요?”
무심코 답했는데 해놓고 보니 좀 그럴듯하다. 소설에서 ‘에피소드끼리의 연결’이 중요한데 동화는 그 점을 제대로 보여준다. 게다가 동화는 ‘질질 끌지’ 않는다. 순간적인 변신을 잘한다. 드라마나 소설 가운데 억지 사건을 만들어 질질 끄는 작품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지금도 동화를 읽는다. 특히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는 빼놓지 않고 읽는 주 목록에 들어간다. 따져보니 십 년에 한 번은 읽는 셈이다. 묘한 건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는 점. 당연한 일 아닌가, 나이에 따라 시대에 따라 받아들이는 관점이 달라지니까.
그동안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국어교사란 직업과 글쓰기를 좋아하는 취미 등으로 하여 제법 읽었다고 자부한다. 그런데도 동화 한 편이 준 충격을 경로우대증 받을 나이가 지난 지금까지 지니고 있다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으리라.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읽고, 대학 다닐 때, 삼십 대 중반에... 사십 오십... 올해도 읽었으니 적어도 이 동화를 여섯 번은 읽은 셈이다. 가끔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 “그 책이 좋은 책이기야 하지만 그렇게까지나…” 아니면 “알프스의 소녀에 그런 마력이 있었던가?” 하는 식의 반응이 대부분이다.
나를 끌어당기는 이 책의 매력은 하이디, 클라라, 페트, 할아버지 알프, 클라라의 할머니, 로텐 마이어 부인 같은 인물들에게 있다. 그 가운데서도 어릴 때는 주로 하이디에 빠졌는데, 청년 시절에는 페트와 클라라였다가, 이제는 할아버지 '알프'가 가장 다가온다.
다 읽어보았겠지만 기억의 한계로 줄거리를 떠올리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잠시 적어본다.
“알프스에서 사람들과 대화하지 않고 외롭게 살아가는 알프 할아버지, 그는 주변 사람들로부터는 달갑지 않은 평가를 받는 사람이지만 '자연은 나쁜 생각 대신 오직 정직만을 가르친다'라고 믿으며 살아간다. 어느 날 할아버지에게 알프스의 순백한 눈을 닮은 어린 손녀 하이디가 이모의 손을 잡고 찾아온다. 뜻밖의 선물처럼 찾아온 아들 부부의 하나뿐인 딸이지만, 사람과의 접촉을 싫어하는 성격이라 하이디가 처음에는 귀찮은 존재일 뿐.
시간이 흐르면서 알프 할아버지는 하이디의 티 없는 행동에 이끌려 비로소 말문을 연다. 아니 세상을 향한 마음의 문을 연다. 마을 사람들이 두려워할 정도로 무뚝뚝하여 말 붙이기조차 어려웠던 할아버지는 다 무너져가는 아랫집 페트의 집을 수리해준다. 연약한 페트의 어머니와 눈이 어두워 앞을 볼 수 없는 할머니에게 겨울은 진눈깨비만큼이나 쓸쓸한 계절이지만, 할아버지의 사랑으로 함박눈처럼 따스해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이디가 가져다준 선물.
허나 오직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데테 이모 때문에 하이디는 다시 도시의 부유한 집안 지체장애아인 클라라의 집에 가게 된다. 그 집에서 하이디가 맡은 역할은 웃음을 잃고 사는 클라라의 말벗이 되어 주는 일. 그런데 돌아가신 클라라 어머니 대신 집안일을 책임지고 있던 로텐 마이어 부인에게 하이디는 못마땅한 존재일 뿐. 촌에서 왔고, 무식하고, 천방지축 날뛴다고 여겨 사사건건 괴롭히지만 알프스의 하얀 눈을 닮은 하이디의 순수성은 이미 클라라의 마음에 쏙 든 뒤라 악당 역을 맡은 로텐 마이어가 지고 만다.
시간이 지나면서 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낀 하이디는 몽유병에 걸리고 결국 알프스로 돌아가게 된다. 알프스는 신령한 힘을 지녔던가. 산으로 돌아온 하이디가 건강을 회복함은 물론 다시 할아버지와 행복한 시간을 갖는다.
이대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지은이는 하이디 한 소녀의 행복으로 만족할 수 없었든지 클라라로 하여금 알프스를 찾도록 만든다. 그리고 산과 꽃과 나무와 별과 염소를 가까이 함으로써 클라라는 어느새 하이디처럼 알프스와 하나가 돼 간다.
그때 단순한 성격의 소년 페트가 일을 저지른다. 클라라가 옴으로써 하이디가 자기와 놀지 않고 그녀와 노는데 질투를 느껴 휠체어를 언덕 밑으로 굴러버렸으니... 위기의 순간 기적이 일어난다. 휠체어 없이는 1m도 움직일 수 없던 클라라가 그동안 짬짬이 발 떼기 연습을 해둔 덕에 휠체어에 의지하지 않고 두 발로 걷게 된 것.”
대부분 동화의 끝이 해피엔딩이듯 이 <알프스의 소녀>도 이렇게 행복하게 끝난다. 아마 줄거리를 읽는 순간 다들 어릴 때 읽은 이 동화가 떠오를 게다. 그리고 어떤 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저 그런 이야기잖아’라고 할지 모르겠다. 허나 이는 옮긴 나의 능력 탓일 뿐 진짜 이 동화는 다시 새겨볼 만한 작품이다.
내가 이번에 읽고 주목한 인물은 '알프' 할아버지다. 나이만 두고 보면 아마도 지금의 내 나이쯤 되었으리라. 흔히 이런 인물을 '입체적 인물'이라 한다. 성격이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으면 '평면적 인물'이라 하는데 그와 반대가 되니까.
이 할아버지로 하여금 성격을 변화시키는데 으뜸 공로자를 꼽으라면 다들 ‘하이디’라 할 것이나 나는 ‘알프스’라고 말하고 싶다. 자연이 사람의 심성을 변화시킬 수 있음은 이미 여러 논문에서 증명된 바 있다. 이 할아버지 믿음은 하나다. ‘자연은 나쁜 생각 대신 오직 정직만을 가르친다’는 사실.
나도 알프스 산맥과는 비교 못해도 아주 풍광 좋은 산골마을에 살고 있다. 적어도 도심에서 살 때보다 ‘낮은 곳으로 눈 돌리기 좋은’ 곳이다. 꽃과 나무가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지만 변함없이 자리 지키는 바위가 있으니 '은인자중(隱忍自重)의 교훈'도 절로 배운다.
헌데도 갈수록 말이 많아지고, 행동은 가벼워지고, 성격은 더 급해지고, 욕심은 늘어나고, 질투와 심술은 한계를 모르고 치솟으니... 알프스가 아니라서 그런가. (부모 잃은) 하이디 같은 손녀는 없어도 그에 못지않게 이쁘고 귀여운 손녀가 둘이나 되는데...
결국 나 자신이 문제다. 아무리 자연이 인간의 심성을 변화시킬 수 있다 해도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문제 있다면 '개발에 주석 편자'나 마찬가지다. 다만 한 번 더 이 동화를 읽었으니 허위가 탈을 벗고 오직 진실만이 내밀한 모습을 보이는 이 가을, 본연의 '나'를 찾는 시간을 가져 보아야겠다.
*. 커버사진을 제외한 본문에 사용된 이미지는 오래 전에 방영된 [알프스의 소녀] 애니메이션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