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일흔에 풀어놓는 소소한 이야기(제17편)
언젠가 수업 시간 아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우리나라 산과 들에 가장 많이 피는 꽃은 무슨 꽃일까?"
그러자 여러 답이 나왔다. 가장 많이 언급된 꽃은 '진달래꽃'. 다음으로 민들레꽃을 답한 사람도 꽤 되었고, 들국화도 나왔다.
"아직 정답이 안 나왔어." 했더니 도무지 감이 안 오는지 옆자리 친구들과 "뭐지?" "뭐지?" 하는 말이 들려오다가 결국 항복 선언을 하며,
"선생님, 도저히 모르겠어요. 도대체 무슨 꽃이에요?"
나는 싱긋 웃으며 이리 말했다.
"이모꽃이란다."
순간 교실이 떠들썩해졌다. 그리고 이구동성으로,
"이모꽃? 그게 무슨 꽃이에요? 그런 꽃도 있어요?" 했다. 심지어 한쪽에서는 "이모꽃이 있으면 고모꽃도 있겠네." 하는 말에 웃음도 터지고.
"이모꽃은 '이름 모를 꽃'의 준말이야."
그러자 "에이 난 또 진짜 꽃 이름인 줄 알고." 하는 말과 "요즘 줄여서 말하기가 유행이라더니 선생님도..." 하는 말이 동시에 들려왔다.
예전엔 우리나라 작가들의 글에, '이름 모를 꽃이 피어 있다', '이름 모를 새가 노래를 부른다.', '이름 모를 나무가 아름드리 솟아 있다.'란 표현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나마 요즘 등단한 이들의 글에 보이지 않음이 얼마나 다행인지...)
대학 다닐 때 창작론을 가르치던 교수님은 우리들이 이런 표현을 하면 아주 혼을 냈다. '세상에 이름 없는 꽃과 새와 나무가 어디 있느냐.'고. "너희들이 당연히 알아야 할 이름을 모를 뿐 없는 게 아니잖느냐. 왜 그들의 존재를 너희들이 무슨 자격으로 부정하느냐!"며 호통을 치셨다.
지구 상에 숨을 쉬고 살아가는 모든 존재는 그 나름의 이름이 있다. 그 존재들은 시인 김춘수 님의 표현을 빌리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지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나는 교직에 있을 때 문제가 많은 교사였다. 특히 수업받는 아이들 이름을 외우는 덴 젬병이었다. 얼굴을 보면 몇 반 학생이라는 걸 아나 이름만은 잘 외우지 못했다. 그래서 편법으로,
'저어기 둘째 줄에 눈이 별처럼 초롱초롱 빛나는 소녀가 대답해 보아라',
'창문가에 해바라기처럼 얼굴이 환한 소년 책 읽어 보아라',
'오른쪽 볼에 복점을 지닌 소녀는 이 시에서 어떤 느낌을 받았니?'
이런 식으로 넘어갔다. 다행히 그런 표현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많아 위기는 탈출했지만, 만약 그 애들의 이름을 불러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시인 박남준은 <이름 부르는 일>이란 시에서 이리 노래했다.
"그 사람 이름을 불러본다
문 밖은 이내 적막강산
가만히 불러보는 이름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뜨겁고 아플 수가 있다니"
그렇다. 아주 사소한 일 같지만 이름 불러준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존재는 나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 아침마다 마을 한 바퀴 돌다 보면 수많은 꽃들을 만난다. 그 가운데 이름 아는 꽃보다 모르는 꽃이 더 많다. 일부러
"어이 금계국 너, 오늘따라 유난히 노랗네. 그래서 네 이름에 금빛을 드러내는 금이 들어갔구나."
"야 계란꽃, 요즘 온통 너희들 세상이구나. 물론 내가 개망초꽃이라 하지 않고 계란꽃이 부른 까닭을 알겠지?"
"자주달개비, 너는 이제 네 세력 너무 뻗지 마라. 너 때문에 다른 풀꽃들이 기를 못 펴잖아."
이렇게 다정하게 얘기 주고받을 꽃은 사실 얼마 안 되고 대부분 이모꽃이다. 아주 진귀한 풀꽃이 아닌 흔히 보는 꽃임에도 그렇다. 이름을 불러주고 싶은데 이름과 꽃을 연결 못 시키는 풀꽃을 여기 나열해 본다.
"괭이밥, 솜나물, 광대수염, 깽깽이풀, 꿩의바람꽃, 으아리, 개별꽃, 요강꽃, 꼬리풀, 처녀치마, 중의무릇, 노루귀, 얼레지, 기름나물, 앉은부채, 뽀리뱅이, 솜방망이, 고추나물, 꽃마리, 앵초, 애기풀, 양지꽃, 꽃다지, 개구리발톱, 방가지똥, 벌꽃, 까치수염, 뚝새풀..."
올 여름이 다 가기 전에 '이모꽃'의 수를 줄이고 싶다. 좀 더 많이 들과 산을 쏘다니며 그들의 이름을 불러줘야겠다.
사소한,
보잘것없는,
그냥 보고 지나치는,
이름 불러주기를 원하는
모든 들꽃에 관심을 보여야겠다.
*. 꽃 사진은 출처를 밝히지 않아도 되는 사이트 'pixabay'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