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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뚱한 발상(2)

나이 일흔에 풀어놓는 소소한 일화(제20편)

* 엉뚱한 발상 (2) *



올봄에 있었던 일이다. 고구마 모종(줄기)을 사러 재래시장에 갔다.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모종 파는 좌판을 찾았는데, 나보다 먼저 온 할머니가 장사치와 얘기 나누고 있었다.

할머니 : 이 고매는 물고맨교, 타박고맨교?

장사치 : 요즘 물고매, 타박고매 하는 사람 어디 있능교. 호박고매, 밤고매, 꿀고매라 하지예.


더 이어졌지만 나는 ‘물고매’란 말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아주 예전 MBC 「장학퀴즈」의 한 장면이 생각나서였다. 그때 진행자는 차인태 아나운서였다.




어느 해 월말 결승전에 진주 모 고등학교 학생이 올랐다. 마지막 한 문제를 남겨두었을 때 그 학생은 간발의 차이로 2등을 달리고 있었다. 만약 그 문제만 맞히면 1등을 하고 연말 결승전에도 나가는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다.

차인태 아나운서가 문제를 읽어내려 가는데 그 학생이 중간에 끊으며 “정답!” 하고 외쳤다. 방청객은 물론 집에서 TV를 보던 시청자들도 모두 숨을 죽였다. 문제의 답은 고구마였다.


사회자 : 자 정답 말씀하세요.

진주 OO고 학생 : (자신에 찬 음성으로) 고매!“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진행자가 자기가 들은 게 애매한지 한 번 더 기회를 주었다.)

사회자 : 다시 한번 똑똑히 말씀해 주세요. 정답은 석 자입니다.

진주 고 학생 : (망설이지 않고) 물고매!

그 뒤의 이야기는 하지 않으련다. 당연히 탈락했고, 학교의 명예를 드높일 절호의 찬스를 날린 ‘물고매 사건’은 그렇게 웃음을 주며 끝났다.




그저께 인터넷 뉴스에서 "앞으로 기상이변 탓에 식량 사정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상황이라, 곡물 자급자족은 식량안보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라는 기사를 읽었다. 즉 앞으로 기후가 들쑥날쑥하여 장기적인 호우, 아니면 극심한 가뭄이 지속될 수 있으므로 그에 대비한 곡물을 심어 위기에 대비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문득 고구마가 떠올랐다. 현재 고구마는 주식이 아니라 부식, 즉 간식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배고파 먹지 않고 입 궁금할 때 먹는다는 말이다. 아내는 고구마나 옥수수를 무척 좋아한다. 밥 대신 매 끼니 그 둘을 먹어라 한다면 서슴없이 택할 사람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에게 고구마는 주식이 아니다.


(외국의 고구마 활용 식단)



자 이쯤에서 뜸을 그만 들이고 글의 주제로 들어가자.

'쌀 대신 간식으로 쓰는 고구마를 주식으로 대체하자.'

그럼 그 이유는? 고구마만큼 신통방통한 곡물이 또 있을까? 일단 물이 부족해도 된다. 아주 조금의 물기만 닿아도 살아남는다. 오죽하면 이슬만 스쳐도 자라는 곡물이라 했겠는가. 허나 벼는 물이 없으면 절대로 자라지 않는다. 심기 전부터 논에 물을 가득 채워야 하고, 베기 직전까지 적어도 반년은 족히 물이 가득 담긴 논에 머물어야 한다. 즉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곡물이 바로 벼다.


다음으로 거름이 거의 필요 없다. 고구마는 거름이 많으면 줄기와 잎만 무성해지고, 알맹이는 쩍쩍 금이 간다. 게다가 한 손에 잡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크다. 벼는 거름 없이는 자라지 않는다. 시골에 소를 키우는 목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소똥 거름을 얻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논을 덮다시피 넣어야 알곡이 된다.

고구마는 또한 병충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 농약을 칠 필요가 없다. 지금은 벼도 품종이 개량돼 농약을 적게 치지만 그래도 유기농이 아닌 한 쳐야 한다. 인체에 덜 해로운 농약이라지만 '농약'이다.


(고구마밭)



게다가 고구마밭엔 화학비료를 주지 않아도 된다. 벼 자람에 화학비료가 들어가야 성장 속도도 빠르고 알곡도 많이 달린다. 그러나 비료 앞에 무엇이 붙었는가. 바로 '화학'이다. 고구마는 화학비료도 필요치 않다. 이 말은 인체에 전혀 해롭지 않다는 말이다. 다만 자라는 과정에 환장하며 덤벼드는 멧돼지 퇴치법을 고안해야 하겠지만.

이뿐 아니다. 일단 심고 난 뒤 거둘 때까지 손이 훨씬 덜 간다. 벼는 농약을 적게 치면 칠수록 논둑 등에 풀이 많이 나니 계속 잡초를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비가 오면 물꼬를 막고 비가 안 오면 열기 위해 수시로 논을 드나들어야 한다. 물이 너무 많아도 너무 적어도 안 되기 때문이다. ‘벼는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러나 고구마는 심고 나서 거둘 때까지 거의 잔손이 안 들어간다.


(고구마 한 품종인 '통째루' 활용 식단 - [충청매일] 2023.11.27)



앞으로 언제인지는 몰라도 통일이 되면 식량 자급자족이 시급한 문제로 대두하리라. 현재 남쪽에선 벼가 남아도는 형편이나 북쪽에선 태부족이다. 이런 상태로 통일이 되면 식량 수급에 막대한 차질이 생긴다. 다행히 북쪽에선 논보다 밭이 많고, 고구마 또한 잘 자란다고 한다.

이런 여러 이유로 하여 장기적으로 벼 대신 고구마를 주식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나의 주장에 반론을 펼 수 있으리라. 반만년 동안 밥 먹어온 습관을 바꾸기가 쉬울까. 허나 식습관 문제는 습관들이기 나름이다. 고구마도 자꾸 먹다 보면 익숙해진다. 이미 아침에 빵을 주식으로 삼는 가정이 많지 않은가. 굳이 세 끼 다 아니더라도 고구마로 만든 빵으로 어른들은 아침 한 끼만 해결해도 된다.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고구마 활용 식단)



그럼 아이들은? 의외로 간단하다. 어린이집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15년 정도 급식을 하니까 그걸 활용하면 된다. 즉. 식단에 고구마를 활용한 음식을 넣는다. 그러면 아이들은 아침엔 집에서 고구마를 활용한 간편식을 하고, 점심은 학교에서 고구마 활용 음식을 머게 되면 세 끼 중 두 끼를 먹게 되니 '고구마 주식'이란 습관이 절로 붙게 된다.

고구마는 콩팥에 이상 있거나 당뇨 환자를 제외하고는 장기복용해도 문제가 없다고 한다. 특히 식이섬유가 많아 변비에 효과가 있고 다이어트에도 탁월하다. 아침 한 끼는 다이어트식으로 고구마를 먹는 연예인이 한둘 아니라 하니 참 다행이다. 왜냐면 연예인과 다이어트, 요즘 이 둘만큼 매력적인 게 더 있을까. (인터넷에 '고구마 다이어트'를 치면 유명 연예인들이 몸매 관리를 위해 실제로 끼니에 고구마가 빠지지 않는다는 자료가 의외로 많다.)


(다이어트용 찐고구마 슬라이스치즈 구이)



2050년쯤 되면 식량 수급난이 현실로 다가오리라는 예상이다. 25년쯤 뒤의 일이니 예순 넘은 사람들에겐 관심 밖의 일일지 모르나, 내 아들 손자는 아니다. 식량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미 중국에선 정부가 나서 고구마를 가공해 먹는 식습관으로 바꾸는 연구를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즉 그네들의 주식인 만두, 국수 등에 밀가루 대신 고구마를 사용하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식품공학과 생명공학을 전공하는 몇몇 학자에 의해 ‘고구마 주식론’이 제기돼 왔다. 그들이 말하는 요지는 다음과 같다.

"세계는 이상기후 탓에 식량사정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상황이라, 지금부터 고구마를 통해 곡물자급률을 높이는 방안을 강구하지 않으면 식량안보는 위협을 받는다."

물고매든 타박고매든 밤고매든 꿀고매든 이제 고매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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