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일흔에 풀어놓는 소소한 이야기(제20편)
더위가 시작되었으나 아직 에어컨을 틀기엔 좀 일러 선풍기만 틀고 있다. 그마저도 발코니나 석 달 전 만든 정자에 쉴 땐 들고 갈 수 없으니 그걸 대신한 게 바로 부채다.
부채는 ‘부치는 채’를 줄인 말이다. 요즘 식으로 하면 남자 친구를 줄여 '남친' 하듯이 만들어진 말이다. 그리고 부채는 방구부채와 접부채 둘로 나누어진다. ‘방구부채’는 아래가 사각형(方) 모양이나 윗부분이 둥글어(球) 그런 이름이 붙었고, ‘접부채’는 말 그대로 접어 다닐 수 있는 부채로 ‘쥘부채’라고도 한다.
우리 집에 부채가 몇 개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건 따로 있다. 특별히 바람이 많이 일어서도 아니고 추억이 어린 부채이기 때문이다. 15년 전쯤 대구ㅇㅇ대학에서 <언어와 문학>을 강의한 적 있었다. 야간강좌라 대부분 30대 중후반으로 그때 한 여학생이 스승의 날에 (방구) 부채를 선물했다.
그 부채는 손에 쥘 때마다 편하고, 바람도 세게 일어나고, 또 참으로 이뻤다. 어디 공예품 가게서 샀는가 했더니, 그게 아니라 직접 손으로 만든 부채라 했다. 대나무를 꺾어 그늘에 말린 다음, 칼로 잘게 하나하나를 가르고, 한지를 입힌 그 위에 수묵화를 그려놓은 정성이 가득 담긴 말 그대로 ‘정(情)의 선물’이었다.
그런데 그 부채의 아래 손잡이 부분에 선물한 이의 서명이 적혔는데 그게 사건(?)을 일으킨 원인이 되었다.
‘과부대표’
선명하게 적혀 있는 이 네 글자를 처음엔 보지 못했다. 바로 보았더라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면서 아내에게 그럴듯한 해명을 했을 텐데….
부채를 내밀자 아내가 부쳐보며 좋아라 하더니 갑자기, “당신, 과부 대표가 누구예요?” 하는 게 아닌가. 목소리에 가시와 서슬이 돋쳐 있어 옷 갈아입다 말고 돌아보며 재빨리 되물었다.
“과부 대표라니?”
“자~알 한다, 과부들이 운영하는 술집에 얼마나 돈을 퍼다 부었으면 과부 대표가 선물을 다 줘!”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과부 대표라니?’
“도대체 무슨 말이야?”
“자, 이 증거물을 보고도 시치미 뗄 거예요?”
정말 아내가 내민 증거물(?)에는 ‘과부대표’란 네 글자가 선명히 적혀 있었다. 처음에 나도 아내처럼 그렇게 읽었다, ‘과부 대표’로. 그리고 여학생 중 누군가 장난치려고 이런 서명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변명을 하려다가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여러 명에게서 갖가지 선물을 받았다면 퍼뜩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워낙 인기 없어 딱 한 명에게 받았으니, 누가 줬는지 알 수밖에. ‘과부대표’는 ‘과부(들의) 대표’로도 읽을 수 있지만 ‘과(의) 부대표’로도 읽을 수 있다는 걸 떠올린 건 천만다행이었다.
바로 내가 강의 나가는 ‘학과의 부대표’가 보내면서 그렇게 서명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과의 부대표’가 선물한다는 뜻으로. 아마도 그녀는 우리 집에서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걸 전혀 예상치 못했으리라. 단순히 가볍게 누가 주는가를 표시한다는 뜻에서 한 일이 그만...
우리말에서 잘못된 띄어쓰기의 사례는 아주 많다.
가장 고전(?)에 속하는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시다' 대신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시다’로부터, 좀 나이 든 이라면 옛날 조흔파 작가의 [얄개전]에 나오는 ‘아기다리 고기다리 던데이트!(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데이트!)’가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노래 제목이 ‘~ 사랑’으로 시작되는 시리즈가 있다. 이 노래를 가수의 이름 뒤에 붙여 읽으면 한 편의 에로틱 코미디가 된다. 예를 들면 <유리상자의 ‘사랑 했어요’>가 ‘유리상자, 의사랑 했어요’가 되고, <이수영의 ‘사랑은 끝났어’>는 ‘이수영, 의사랑은 끝났어.’가 되고, <캔의 ‘사랑해서 미안합니다’>도 ‘캔, 의사랑 해서 미안합니다.’로 절정을 이룬다.
지금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그때 왜 아내는 하필 ‘과 부대표’가 아닌 ‘과부 대표’로 읽었을까? 술집에 좀 다녔지만 그렇다고 여자 문제 일으킨 적이 한 번도 없는데… 혹 아내는 과부 대표가 운영하는 술집에 가고픈 나의 엉큼한 속을 들여다보고 그런 짐작을 했을까? 부채질할 때마다 궁금하다. 아내의 속이, 아니 내 속이...
*. 두 번째 부채 사진을 보면 윗줄에는 대학 이름과 과 이름이, 아랫줄에는 1학년 B반 김○○ 과부대표’란 서명이 흐릿하게 보일 겁니다.
처음 이 부채에는 아랫줄 마지막 끝 넉 자 ‘과부대표’만 있었습니다만 들고 가 우리 집에서 있었던 사건을 얘기했더니 그 학생이 대뜸 빼앗아 앞부분에다 상세한 신분을 덧붙였습니다. 저로서는 원래 서명 그대로가 더 추억거리가 되는 건데, 준 사람이 바꾸었으니 참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