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이름이 근무 표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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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쉰다. 나는 쉬지 않는다. 그래도 매일 아이들을 볼 수 있다. 그게 지금 내가 존재할 만하다고 느끼는 이유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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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쓰고 싶은 말이 많았다.라고 쓰고 보니 나는 항상 글을 말이라고 쓴다. 그리고 매번 말을 글로 수정한다. 그건 아마도 내가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을 글로 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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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쓰고 싶은 글이 많았다. 하다를 하원하러 가기로 하며, 운동을 하기로 하며, 쓰지 못했다. 씀을 뒤로 미루었더니 결국 말을 다 쓰지 못한 날이 되었다. 하루 묵은 감성의 글이 써지겠지 뭐, 하고 생각했다. 오늘 쓸 거리가 남았다고 생각하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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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녀의 이름이 근무 표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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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만 써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쓸 것이 없다. 생각나는 족족 글 써버리고 나니 글감이 사라진다. 길게 풀어놓지도 못하고 급급하게 던져놓은 것 들을 건져다가 ‘탁’ 털어 펼치고 글을 써야 할 것 같다. 주먹만 한 이야기가 펼치고 봤더니 엄마 치맛자락만큼 넓게 펄럭일지도 모른다. 그러길 바라본다. 그나저나 그래서 작가들은 그렇게 메모를 했나 보다. 족족 쓰니, 떠오르고 사라지는 것이 얼마나 아까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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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진 장편소설, 부끄러움의 시대
그의 책에서는 유령인 아버지가 나온다. 아버지가 정말로 유령은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유령이 된 쪽은 어머니다. 어쨌거나 나는 그의 아버지처럼 유령 같은 일을 한다. 유령처럼 있어야 하는 일. 어쩌면 눈에 띄는 것이 좋은 사람은 이 유령 같은 일이 조금 힘들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나처럼 눈에 띄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던 사람도 이 일이 힘들다. 조용히 있고 싶지만 존재감마저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그의 아버지는 존재가 드러나지 않음으로 인해 존재감이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알지 못하기에 완벽한 존재를 완성하는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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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이것으로 글을 써야지 하며 생각했던 것이 있다. 가물가물 사라져 버렸다. 아 방금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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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한 쌍이 준 고찰 1_함께 살아가는 거리
새 한 쌍이 하늘을 날고 있다. 그들의 거리는 아무리 날아도 서로의 날개가 닿지 않을 충분한 여유가 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도 결코 날기에 방해되는 영역을 넘어서지 않는다. 함께에서 중요한 것은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닐까. 누가 먼저 가 아니라 같이 같은 행위를 하며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가는 동안 서로가 서로에게 방해가 되는 행동을 하지 않음으로, 같이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서로를 고무시킬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 넘어서지 않으며 살아가는 것. 아니 날아가는 것.
새 한 쌍이 준 고찰 2_존재의 시작
존재에 대한 고찰을 시작한 사람은 분명 누군가를 어떤 방식으로도 잃어버렸을 것이다. 방금 전까지 하늘을 날 던 새 한 쌍이 구름 뒤로 사라졌다. 있었는데 없어졌다. 그렇다면 새 한 쌍은 지금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분명 존재했다고 믿었으나 지금 눈앞에 없다면 그의 실존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저기에 새 한 쌍이 있었다. 고로 지금도 새는 존재할 것이다,라는 가설은 근거가 충분한가?
있었으나, 없다. 있었으나 없고 그러나 있을 것이다. ‘있을 것’이라는 말은 미래 시점의 문장이기도 하고 가정의 문장이기도 하다. 결국 미래는 온통 가정만이 있는 것이다. 실존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실존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어젯밤에 같이 잠이 들었던 엄마가, 오늘 아침엔 사라졌어,라며 난데없이 세상을 잃은 아이의 울음을 달랠 실존적이고 실재적인 증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훗날 내가 정말 사라져 버렸을 때, 그 시점의 현재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나의 사랑이 실재했음을 나는 증명해 두어야 한다. 나의 존재가 사라져도 나의 사랑은 존재했고, 존재하며 존재할 것이라는 명징한 증거를 남겨야만 한다. 나는 ‘어떻게’라는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완벽한 해답을 찾지는 못했다. 다만, 내가 남기는 매일의 글들이 나의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기록이 되기를 바란다. 나의 모든 글과 마음이 결국엔 ‘사랑해’로 읽히기를. 결국 나는 모양만 다른 같은 말을 반복하는 셈이다. 사랑해 사랑해. 모든 단어는 사랑해로 이루어져 있다.
9
그녀가 근무 표에서 사라지고 나니, 하다고 함께 참석하고 싶었던 그날이 근무일에서 쉬는 날로 바뀌었다. 나는 빨리 7일이 되었으면 좋겠고, 그날 하다와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어린이집에 알리고 싶다. 그러나 나는, 근무표에 그녀의 이름이 다시 나타나길 바란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궁금하다. 연락이 다시 오기를. 그녀를 다시 볼 수 있기를. 보지 않게 되더라도 괜찮기만 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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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어린이날이라서 아이들 용돈을 좀 보냈다고. 어떻게 이렇게 궁핍한 줄 알고, 이럴 때 내가 속상하게 갖고 싶은 걸 사달라고 매일 떼를 쓰고 눈물을 보이는 줄 알고.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는지 어떻게 알고 엄마는. 아니야 엄마 써. 하고 말하고 싶지만 삼켜두고 고맙다고 했다. 우주랑 하다가 너무 좋아할 거야.라고 했다. 이제 받는 일보다 주는 일이 많은 사람이 되다 보니, 받는 사람이 기쁘게 받으면 주는 마음이 얼마나 행복해지는 지도 알게 됐다. 나도 얼른, 엄마와 아빠에게 아낌없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아마도 그런 날은 쉽게 오지 않을 테다. 그저 좀 더 자주 연락을 해야겠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그것뿐이라. 그저 내가 행복하다고 믿고 살며 그것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드릴 수 있는 전부라. 나는 염치없지만 행복해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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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가 이륙을 시작했다. 시작하자마자 시야에서 사라졌다. 구름 뒤로 가버린 것일까. 요즘엔 구름 뒤로 사라지는 것들이 많다. 오늘은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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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매장이 심란하다. 갑자기 사라진 그녀도 그렇고. 오늘은 오전에 3명 중간에 실장님까지 오셨지만 사람이 많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손님들이 많이 들어왔다. 오전에 체크하는 주요한 제품의 재고 조사를 하지 못했고 이고도 늦게 신청했다. 팀장님은 스케줄을 다시 짜느라 바쁘셨다.
야간 근무셨던 팀장님이 주간으로 오셨다. 모든 직원의 성향을 다 파악하긴 힘들지만 아직 그분에 대한 데이터가 없다. 그래서 조심스럽다. 말이 유독 없는 하루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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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려진 콩
“오빠 요즘에 나는 물에 불려진 채로 맷돌구멍 속에 있는 콩 같아. ”
다리가 너무 아팠다. 날씨 탓이려나 하고 나왔는데 비가 그쳐있다. 어제 운동 때문일까. 병원에 가야 하나. 아이들이 아픈 데가 많다. 우주도 다리도 아프고 알레르기 안과도 다녀왔고 이비인후과에서 감기와 비염 약을 처방받아 왔다. 아이들이 병원에 자꾸 가야 하니 나라도 덜 가야 할 것 같다. 아이들을 돌봐야 할수록 내 몸은 더 부서지지만 점점 더 나를 뒤에 두게 된다.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어쩔 수 없이 희생해야 한다면 1순위는 무조건 엄마인 나다. 어쩔 수 없이 그게 내가 가진 사랑의 모습이다.
세상이 돌아간다. 내 아래는 남편이란 돌이 있고 그 위에 아이들이란 돌이 있다. 세상이 맷돌을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 속에 들었던 불어 터진 내가 갈아진다. 그렇게 산다. 그런 무게로 그런 강도로. 갈아진 내가 말한다.
“그래도 매일 우리라는 이름으로 비벼대고 있으니 갈려도 좋아. 이제 나는 뭐가 될까. 콩국수의 콩물이 될까.”
내 사랑의 모습은 불어 터진 콩, 갈린 콩.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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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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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웠다. 오늘 정리해야 할 만큼의 물건을 다 정리하고 팔아치울 물건을 팔고 예의가 없는 고객도 몇 상대했다. 그런 고객들은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친절한 사람들을 만났고, 그런 사람들과 일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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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 잔을 사주면서, 그는 오늘은 제가 낼 차례예요 하고 말했다.
받는 사람이 마음 편하게 받아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동시에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 주는 마음이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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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야 한다. 아이들이 기다린다고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의 기록은 이것으로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