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비염, 갑 티슈, 가난 레츠고.
나는 백일마다 비염 환자가 된다. 비염은 약 이주일 정도 지속되는데, 다시 팔십여 일 즈음이 지나면 코가 시큰 거리기 시작한다. 주기적인 비염의 원인은 강아지 털이다. 우리 집 강아지는 털이 복실할 때가 예쁘지만, 비염 환자가 되어버린 나와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이 그의 털을 밀어야 한다. 함께 살며 얻은 병이니 털 미는 것쯤은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강아지 이름은 "끈끈이"이다. 그 의미는 남자 셋 살던 우리 가족을 더 끈끈하게 해달라고 붙인 이름이다.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급격히 작아진 집에서는 싸우거나, 밉거나, 싫어도, 엉겨 붙어 생활해야 했다. 하지만 다시 집이 커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경상도 남자 셋은 싸우지 않아도 과묵하다. 우리는 저녁 먹고 나면 각자 방에 들어갔다. 나는 흩어진 이후 거실의 어둠이, 대화가 없던 우리 가족의 침묵이, 살가운 가족이면 있을 스킨십이 전혀 없는 일상이 싫었다. 아기나 동물이 있으면 나아진다고 해서 내가 데려온 강아지가 끈끈이다.
끈끈이는 가족 말고, 나의 코도 끈끈하게 했다. 비염은 코를 푸는 것이 의미가 없다. 콧물은 몇 분 지나지 않아서 다시금 코에서 고개를 내민다. 달리 방법이 없어서 나는 화장실로 달린다. 코를 풀고, 손을 씻는다. 어릴 때부터 비염을 달고 살던 것이 아니라서 처음에는 두루마리 휴지에다 코를 세차게 풀었다. 코가 헐고 나서야 깨달았다. 부드러운 휴지가 아니라면 코가 금세 헐어버린 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 집에도 갑 티슈가 있다. 처음 독립할 때 대출해 준 은행에서 작은 갑 티슈를 줬다. 하지만 오 년이나 지난 지금, 갑 티슈는 한 통도 쓰지 못했다. 부드러운 휴지에는 선뜻 손이 가질 않는다. 갑 티슈 위는 먼지가 쌓이고, 청소를 할 때면 갑 티슈 통 위 먼지도 닦는 것은 루틴이 됐다. 가난의 시간은 진한 누렁색 라이언을 레몬 색으로 바꾸며 존재감을 증명한다. 저마다 가난의 형태는 다르게 나타나고, 다른 사람은 차마 알지 못할 수치스러움을 남기고, 이제는 벗어났다 생각해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주기적으로 알려준다.
나야, 정서적 가난. 근데 이제 왜곡을 곁들인.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것은 아버지의 말을 통해 알았다. 아버지는 나에게 가난과 힘듦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고, 장남으로서 내가 하루빨리 성숙해지길 바랐다. 나에게 청소년기는 허락되지 않았다. 아동기에서 성인기로 순간 점프해야만 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연상과의 연애가 잘 맞았다. 연하의 상대가 칭얼대는 것을 보면 이성보다도 그저 아이처럼만 느꼈다.
연상의 상대는 내게 "연하 같지 않고, 오히려 나보다도 연상이라 느낄 때가 많아."라고 했다. 이것이야말로 내게 최고의 찬사였고, 추구해야 할 삶의 지향이었고, 성숙한 어른의 사랑이라 여겼다. 다만 서른 중반, 소위 사회가 규정한 적령기에 들어선 나에게 왜곡된 사랑은 연애나 결혼을 방해하는 걸림돌이다. 애당초 결혼을 전제하지 않으면 만날 이유가 없고, 결혼은 곧 출산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시선은 왜곡되었지만, 주위 사람들로부터 받는 시선들은 왜곡되지 않고 올곧게 느낀다. 왜곡 덕분에 연상도, 연하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우리 집의 가난이 다른 집의 가난과 다름을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다른 집의 가난이 춥고 배고픔 같이 몸으로 견뎌내야 하는 것에 직관적인 것에 치중되어 있다면, 우리 집의 가난은 군데군데 찢어진 마음을 벼려내야 하는 간접적인 것에 치중되어 있다. 하지만 빈곤만을 가난이라 여기는 현실은 달랐다. 타인으로부터 돌봄이 절실히 필요했지만, 그 누구 하나 선뜻 돌봐주는 이가 없었다. 정서적 가난에는 나의 시선과 외부의 시선이 달랐다. 즉 왜곡이 존재했다.
가난과 작별하지 않는다.
이혼을 대놓고 흉볼 정도로 흔치 않던 시절에, 아버지와 남자 형제 둘 사는 것은 법적으로 규명조차 되지 않던 시절에,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면 고추가 떨어지는 가부장적 시절에, 나는 돌봄이 필요한 시기였고, 라면이나 LA갈비만 반복해서 먹을 것이 아니라 균형 잡힌 식단이 필요한 시기였고, 여러 가지 불안을 느끼기보다는 해맑은 웃음과 어리광을 뽐냈어야 하는 시기였다.
아버지가 누군가에게 도움 요청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만 같다. 아마 도움 요청할 곳이 마땅히 없었을 것이다. 사회보장 시스템에서도 배제되어 있었고, 친척이나 주위 관계망으로부터도 도움 받지 못했고, 우리 가족은 스스로 응당 인내해야 할 것으로 여겼다. 당시 우리 집은 다수보다 절대 소수에 가까웠고, 소수성은 다수결 민주주의 아래에서는 쉬이 묵살된다.
그래서 일인칭 가난을 이어 썼다. 가난은 겪는 사람마다, 시대마다, 환경마다, 다르게 드러나고 정의된다. 나를 더 이상 가난하지 않다며 손가락질할 사람이 있을 테다. 하지만 내 삶은 계속 누적되어 쌓인 총채이며, 빈곤은 몰라도 가난은 여전히 깊숙이 묻어있다. 내가 당사자였다는 사실은 언제까지고 변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제 빈곤에서 벗어났으니 가난을 말할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당사자를 벗어났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지나버린 시대의 가난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의미 없는 것만은 아니다. 내 삶에 과거의 가난이 영향을 미치듯이, 우리 사회에 실재했던 과거의 가난도 현재 실존하는 구성원의 마음, 각기 다른 가난이 드러내는 행태, 사회 규범 등에 영향을 미친다. 내가 경험한 밀레니얼 시대의 가난은 극히 일부분일 테다. 때로는 수치스러우면서도 응당 수고스러웠고, 지난하면서도 현저하게 지속되었고, 단념케 하면서도 나를 단호케 만들기도 했다. 나의 내밀한 가난이 모여 현재가 되었듯이, 더 많은 사람의 내밀한 가난이 모이면 사회도 그렇게 현재가 되어갈 것이다.
제 지리멸렬한 스무 편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깊이, 감응하며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