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 손 벌리지 않고, 독립한 지가 오 년이다. 나는 이미 가난을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착각이었고, 가난은 현재 진행형인 데다 미래까지 함께할 동반자라고 생각한다. 가난은 몸과 마음, 생활 패턴, 사고방식 등 삶의 곳곳에 진드기처럼 붙어 있다. 가난을 애써 회피하고,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았지만, 가난했던 과거로 내 삶에는 불안이 항상 함께다.
초등학교 때까지 살았던 집은 이층짜리 주택이었다. 물론 주인집은 이층에 살았고, 일층에 우리 집을 포함해 세 가구가 살았다. 어렸을 때는 알지 못했지만 집 구조를 어느 정도 알게 된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집은 지을 때부터 일층이 세 가구로 지어졌던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알 수 있냐면, 그때의 우리 집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용변을 처리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일층에 살았던 세 가구는 마당에 있는 한 칸짜리 공용 화장실을 사용했고, 그것은 재래식 화장실이었다. 집 안에는 세탁기를 놓았던, 야외도 실내도 아닌 공간이 화장실이었고, 그곳에서 옷도 몸도 씻어야 했다.
당연히 거실도 없었다. 방은 두 칸이었지만, 보다 큰 방에서 네 가족이 함께 자고 생활했다. 작은 방은 부엌으로 이동하기 위한 공간 정도의 쓸모였다. 나와 동생은 그곳에서 공부는 가끔씩, 컴퓨터 게임은 자주 했다. 컴퓨터는 한대뿐이었고, 연년생의 남동생과 컴퓨터를 차지하기 위해서 주먹다짐을 해야 할 때도 있었다. 우리는 한 명이 게임을 하면, 한 명은 옆에서 훈수를 두는 형태로 게임을 즐기곤 했다.
지나 온 가난에 대해 쓰면 끝도 없을 것이다. 아버지는 현장에서 노동하는 목수인데, 내가 열 살 때 이혼 한 후에 나와 남동생을 피와 땀으로 키웠다. 아버지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연장을 다루다가 실수해 손에 피멍이 들거나, 작업 복에서 나던 땀 냄새가 이를 증명했다. 온전하게 아버지의 정직한 노력만으로 우리 집은 절대적인 빈곤, 즉 가난에서 벗어났다.
절대적 빈곤으로부터 벗어났기에, 이제는 가난이 내 삶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목수로 노동 중이고 나와 남동생도 각자의 직업을 가졌다. 나는 사회복지사로서 사회복지 제도를 알고 있었기에, '중소기업 취업청년전세자금대출'을 활용해서 독립까지 쟁취했다. 스스로의 경제 상태를 평가하는 설문을 할 때면, '중' 혹은 '중상'으로 응답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가난은 내 삶에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케케묵은 가난은 필요 이상의 불안을 내 속 깊숙하게 심어 두었다. 우리 집은 '기초생활보장' 등의 제도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경계 밖 가난이었다. 당시에는 한부모가정이 많지 않았던 터라 우리 집은 항상 지원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경계 밖 가난이 데리고 온 불안은, 딱 그 정도 경계선을 즐기기를 좋아했다. 더 이상 가난하지 않아서 티가 안 난다고 생각했지만, 남들은 느끼는 딱 그 정도 말이다.
가난이 남긴 현재의 불안을 예로 들면, 한 겨울 집 안에서 빨래를 말리려고 두툼한 옷 여러 벌을 입는다. 옥상에 빨래건조대를 설치해도, 바람에 쉬이 넘어져서 땅에 먼지와 함께 누워있기 일쑤다. 나는 집 안에서 창문을 종일 열어 두어 빨래를 말린다. 집 밖이랑 다를 바 없는 집 안이다. 입김이 눈에 선명히 보일 지경이지만,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했다. 단돈 5,500원이면 집 근처 빨래방에서 건조기를 돌릴 수 있지만, 나는 하루 종일 덜덜 떠는 것을 선택한다.
또한 나는 최근에 통풍 진단을 받았다. '왕의 병'이라고 알려진 통풍과 가난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 두어야만 했다. 밀키트가 없었기에 따뜻한 음식이 있으면 배불리 먹어두는 것이 언제나 좋았다. 아버지도 내가 잘 먹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햄버거를 4개나 먹을 정도의 대식가가 되었지만, 폭식으로 통풍을 얻었다. 통풍도 때로는 가난의 질병일 수 있다.
뿐만 아니다. 나와 남동생 둘이 라면으로 식사를 해결해야 하는 날이 많았다. 초등학생과 컴퓨터 게임의 결합은 라면 끓이기를 잊도록 한다. 우리는 끓다가 못해서 졸아버려 국물이 아예 없는 라면을 먹었다. 소태가 된 라면을 차마 버리지도 못했다. 가난이 무엇인지 경험해 본 사람은 무언가를 버리는 것이 참 어렵다. 덕분에 지금도 짜지 않은 음식은 먹는 게 고통스러울 정도다.
다행인 것은 아니지만, 최근 기후 위기가 심각한 문제다. 나는 사회 변화에 관심이 많아서 미니멀리즘으로 삶의 가치관을 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최소한의 소비를 하는 것이, 온전히 환경 가치 소비만은 아닐 수 있다. 나는 돈을 마음껏 써본 적이 없어서 소비를 망설이는 것도 분명히 크나 큰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또한 평소에는 믿어 의심치 않는 사회 제도가 있음에도, 돈 모으는 것에 목을 맨다. 언제쯤 가난에 다시 빠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나를 조종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안으로 인해 가장 불쾌했던 것은 가족으로 함께 사는 강아지의 사료나 용품 등을 구매하거나 병원에 갈 때 망설이게 되는 상황의 경험이었다. 꼭 필요한 소비에 고민하고 망설인다는 것이 괴롭다. 내가 만약 결혼을 해서 아기를 낳아도 비슷할까 두렵다. 이처럼 가난은 최소한의 삶을 살아갈 정도 돈을 스스로 벌게 되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어렸을 때 경험한 가난은 삶 전체에 불안을 선명히 남긴다. 나는 이렇게 가난한 불안과 함께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