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 연숙은,
장바구니를 두 팔로 감싸안고 집으로 내달렸다.
45도 경사진 언덕을 올라 빌라 3층까지 숨이 턱에 닿
도록 뛰었다.
찬거리를 사러 나갔다 이웃집 언니를 만나 잠시 얘기를 나눈 것이 그만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6시 50분이면 민오가 현관에 들어 설텐데, 저녁식사 준비시간이 40분밖에 남질 않았으니 큰 일이다. 퇴근 하자마자 식탁은 차려져 있어야 했고, 된장찌개는 때 맞춰 보글보글 끓고 있어야 했다.
연숙은 재빠르게 몇가지 일을 동시에 시작했고 끝내고 또 시작했다.
"딩 - 동"
절대 민오 스스로 문을 여는 법이 없다.
벨소리 한 번에 문을 열어야 하고, 문 앞에 서 있다가 맞이해야 하는 것이 이 집만의 법.
가장이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 가족 모두는 현관에 기립하여, 누구 한 사람도 인상 쓰는 일 없이 맞이 인사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 지구상에서 오직 이 집에만 있는 법은 이것 말고도 양손가락 꼽을 정도가 있는데, 식탁에서는 누구도 말을 해서는 안 되고, 음식 먹는 소리가 나도 안 되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진아가 어쩌다 "엄마 -" 하면서 무심결에 말이 나온 적이 있었는데, 그 날은 저녁을 먹을 수 없는 거는 물론이고 어른 말을 새겨 듣지 않는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아빠를 무시하니 어쩌니 온 세상이 시끄럽게 되는 것이다. 진아와 연숙은 둘만 있으면 재미나게 얘기도 잘 하고 웃다가도 민오만 집에 있으면 두 사람도 입을 딱 붙이고 만다. 남편 스스로 제 입지를 뾰족하게 깍아 올려 불안하고 외롭고 고독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른 집들은 딸과 아빠 사이가 화기애애, 러브러브 하지만 우리 집에서는 먼 나라, 딴 세상 얘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