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별 Apr 08. 2023

내 인생에 별표가 필요한 것

돌고 돌아 또다시



그림도 안 그리고 글도 안 쓴 지 2주 정도 되는 날. 저번부터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고는 있었다. 그럼에도 글을 쓰지 않는다는 건, 휴식 시간에 글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다는 건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그동안 나는 할 일이 워낙 많아서 바쁘다는 이유로 이 질문을, 창작의 활동을 제쳐두었다. 내가 창작가로서 살아가고 있구나를 느끼는 행동은 매번 2순위로, 3순위로, 4순위로 빠질 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자투리 시간은 많았고 글은 순간마다 충분히 쓸 수 있었다. 그럼 도대체 나는 왜 나를 표현하는 창작가로서 사는 것을 택하지 않은 걸까. 창작가라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음을 왜 반복하지 않은 건가. 계속 미뤄둔 이 질문을 지금에서야 돌아봤다.



내게 글과 그림은 정말 중요한 행동 중 하나였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미루었던 것인가. 글을 쓰며 생각을 해보지만 솔직히 아직까지도 답은 불투명하다. 여러 가지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뭉쳐진 듯하다. 오늘 이 뭉텅이를 풀어헤쳐봐야겠다.


창작에 마음이 식은 큰 이유 중 하나는, 고민을 모두 표현했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이미 모두 해버려서, 표현할 거리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에는 모순점이 있다. 나는 힘들 때만 글을 썼고 힘들 때만 창작에 의미가 있었던가? 그건 아니다. 올해 1~2월, 큰 고민이 없었음에도 글을 꾸준히 썼다. 주내용은 일상에서 보고 깨달은 것들이었다. 새로운 경험을 통해 원래의 내 가치관을 더욱 확고히 다질 수 있었고 머릿속에 이러한 생각들이 더 깊이 저장되기도 했다. 다시 말해, 불안과 걱정만이 글감이 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지금의 나, 흘러가는 나의 시간을 관조하는 나는 호기심을 잃어버렸다. 질문하는 것을 잃어버렸고 고심하는 것을 잃어버렸다. 그러자 깨달음을 잃어버렸고 창작을 잃어버렸고, 삶에 대한 기대감을 잃어버렸다. 행복이라 생각했던 최근의 행보들은 단념의 결과였다.

그러자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졌다. 지금 내 일상이 단세포와 뭐가 다른가. 그저 존재하며 눈앞에 놓인 것을 했을 뿐인데. 흘러가는 대로 살고 싶지 않다. 살아있구나를 느끼며 내 존재를 이 세상에 외치는 행동을 하며 살고 싶다. 나에게는 글을 쓰는 순간이 살아있다고 느끼는 순간이다.



요즘은 매일이 그저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오늘에 기대도 가지지 않고 흘러가는 시간과 적당한 타협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었다. 방학이 끝나고 시험공부를 시작하면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건 사치라는 생각조차 들었다. 마치 예전의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이 시간에 공부를 더 하자‘라는 마음 때문에 나 스스로가 나에게 그저 그런 날을 살게끔 했다. 그렇게 글과 그림을 일상에서 배제하자, 남은 자투리 시간은 공부가 아니라 유튜브와 웹툰으로 돌아갔다. 결국 공부 시간은 전혀 늘지 않았고 그동안 나는 영혼 없는 시각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윤동주의 ‘쉽게 씌여진 시’가 생각나는 밤이다. 육첩방 같은 내 내면의 틀과 이 틀에 흐르는 밤비는, 마치 나 스스로가 내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도록 가둬둔 듯하다.


연필, 식물, 가방도 저마다의 색을 지니는데, 나는 나만의 색을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주변의 색에 물들어만 갔다.


스트레스가 없다고 생각했다. 불안이 없다고 생각했다.  “요즘 너무 잘 살고 있다”라는 짧은 일기를 적고는 만족스럽게(정말로 만족스럽다고 생각했다. 조그마한 마음 한켠에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말이다.) 플래너를 덮는 하루의 연속. 진심으로 나를 되돌아보고 깨달은 점을 적는 일기 같지가 않았다. 점점 영혼 없는 일기만이 줄지어 적히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내가 잘 살고 있음을 인식하는 매개는, 학교 수업시간에 졸지 않고 집중해서 듣는 것, 오늘치의 공부를 끝내는 것이 되어있었다. 예전에는 창작과 공부의 균형에 신경을 썼는데 말이다.



SNS에 들어가서 내 글의 업로드 기간만을 보며, “글 써야 되는데” 만을 되뇔 뿐, 메모장을 조금 뒤적거리다가 마침표를 찍는 다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기에는 지금 너무 바쁘다”라는 그럴듯한 핑계를 댔지만 유튜브는 꼬박꼬박 챙겨보는 나. 그 이유로는 먼저, “글과 그림은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유튜브는 비교적 짧다”라는 전제가 있었다. 그런데 유튜브는 짧게만 느껴질 뿐, 전혀 짧지가 않다. 딱히 유익한 영상을 보는 것도 아니니, 시간을 들여도 얻는 것은 단순 재미일 뿐. 공부에 기여하는 점은 없다. 하지만, 글은 다르다. 창작은 내 삶의 통찰을 정리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한다. 그러자 공부가 훨씬 잘 되는 경험을 나는 많이 해왔다. 이렇게 적고 보니, 왜 그렇게 글과 그림을 제거하려 들었는지, 참 웃기는 노릇이었구나 생각이 든다.


내가 바라는 삶은 나를 표현하고 깨달으며 성장하는 삶이지 않은가.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만을 집중하는 삶은 건강하지 못하다고 느낀다. 최근 내 삶이 딱 이러한 경향을 띠었는데, 만족스럽기는 한데 무엇인가 단정 지을 수 없는 허함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 생각은 정말 잠깐 동안 존재했다. 나는 이 생각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빠르게 스킵했고, 더 빠르게 닥칠 미래를 대비하기 바빴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쫓기며 사는 삶이 힘들다. 나는 여유를 챙겨야 하고 온전한 내면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사람이다. 왜 나는 나 스스로 쫓기는 삶을 살도록 만들었을까.


긴 방학이 지나고 오랜만에 등교를 했다.

새로운 반, 새로운 얼굴. 익숙해지기도 전에 모의고사를 쳤고 한 달의 시험기간이 들이닥쳤다. 내 일상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모두 뒤바뀌었다. 그러자, 나는 불안했던 거다. 원하는 목표치를 성공시키기 위해, 부족한 공부량을 채우기 위해 계속해서 나를 닦달했다. 그놈의 불안 때문에 나는 글을 버렸고 그림을 버렸고, 영혼의 샘을 버렸다. 그런데 참으로 웃긴 점은 내가 전혀 자각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2주간 나는 그저 이것을 열심히 사는 것으로 단정 지었고 더 이상 질문하려 하지 않았다. 지금 내게는 공부가 가장 중요한 것이니까, 내가 원하는 게 뚜렷해서 생기는 일인 것 같았다. 그런데 이렇게 글을 써보니 더욱 확실해졌다. 나는 쓰고 그리는 삶을 살아야겠다. 글을 다시 쓴 지 이틀 째 되는 오늘, 내 행동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는 나를 인식했기 때문이다.



어젯밤부터 다시 글을 쓰고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단정 짓기 어려운 그 허함이 사라졌다. 근육통으로 조금 쑤신 몸, 유튜브대신 글을 쓰는 손. 내가 결정하는 이 모든 감각이 나라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었다. 감각은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 자연스럽지만 뚜렷하게 느끼도록 한다. 그러면서 더욱 미래의 나를 거듭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고, 그러자 자연스럽게 공부에 진심을 다하게 된다.



표현하며 기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2주간의 방황과 존재는 내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어떤 정체성으로 살 것인지, 이 행동으로 무엇을 느낄 것인지, 무엇을 표현할 것인지 알아채라고.

이전 04화 영어 공부가 지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