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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재 Aug 25. 2023

직소퍼즐

    모국어는 이상하다. 날 피로하게 만들고 편안하게 만든다. 생각을 거치지 않아도 자연스레 된다. 되어진다. 뇌가 명령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인다. 귀에 들어오는 거친 욕, 불쾌한 비아냥, 따뜻한 격려, 장난스러운 농담에 몸이 먼저 반응한다. 그건 언제나 날 피로하게 만들고 편안하게 만든다. 나는 이방인으로 튕겨져 나갈 때와 이방인으로 편입되려 노력하는 두 입장을 잘 안다. 전자는 내게 무력감을 선사하고 후자는 날 자주 비참하게 만든다. 내 생존전략은 환경에 발 맞춰 바뀐다. 새하얗게 모르는 척을 하다가도 모든 걸 통달한 척할 수 있다. 주도권을 쥐었다 놨다 뺏겼다 반복한다. 외국어는 날 헷갈리게 만들고 보너스 찬스처럼 찾아오는가 하면 아무렇지 않게 날 저버린다.

    학교에서 철저히 이방인으로 생활하며 영어가 모국어인 백인 사이에서 한국어를 쓸 일이 단 한 번 있었는데 유학 온 한국 학생이 배가 아파 조퇴하고 싶다는 말을 하지 못해 내가 통역해야 했던 때였다. 그 날을 제외하고는 사람들은 내가 모국어로 이야기하는 걸 본 적이 없다. 나는 점심시간 이후 책 읽는 시간에도 철저히 영어를 읽어야 했다. 친구들은 내 모국어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나는 내 모국어를 부끄러워 했을까. 그리워했던 것만은 확실하다만 부끄러운 것을 그리워할 수 있나. 나는 12살의 어휘력으로 구사하고 알아들을 수 있는 욕지거리, 애교, 안부 인사와 반어법을 그리워했다. 누군가 한국어는 왜 그러냐고 물어봐도 제대로 대답할 수 없는 문장을. 만남과 헤어짐의 인사가 똑같은 ‘안녕’인 걸 너희는 절대 모르겠지.

    그래서 난 오랫동안 모국어의 부재를 깨진 말로 채웠다. 온갖 티비쇼의 열혈 시청자였던 나는 거기서 배운 rape(강간), bullshit(구라), dragqueen(드랙퀸) 같은 단어를 뜻도 모르고 부적절한 순간에 학교 복도에서 모두가 들리게 썼다. 분위기가 오묘해지는 줄도 모르는 채. 새로운 단어를 써봤다는 사실에 오묘해지는 분위기를 감지할 새도 없이. 그런 말인 줄 몰랐으며 이렇게 소속감에 대한 불안을 잠재우고 싶었다는 설명을 덧붙일 깜냥은 없는 채로. 그런 기억에 1년 혹은 10년 후 깨달음의 순간들이 겹겹이 쌓여 나는 부끄러움과 수치를 기반으로 산다. 깨진 말은 기어코 사람을 부끄럽게 만든다.

    한국에 돌아온 뒤로는 깨진 한국어를 썼다. 친구와 대화하다 부담스럽다는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pressure(압력)이라고 말했다가 빈축을 산다. 근 3년 간 한국어를 쓸 일 없던 내 글씨는 담임 선생님의 칭찬도장을 받기엔 너무 삐뚤다. 그곳에서는 dozen(12개)이 뭔지 몰라 수학을 못 풀고 여기서는 나눗셈의 나머지를 r(remainder) 옆에 표시하지 않아 문제를 틀린다. 수학 못 하는 아시안, 외국물 먹은 한국인. 그게 내 정체다.

    지난주에는 유학생활 중 만난 중국인 친구 지아징과 한국 드라마에 중국어 번체 자막을 켜놓고 봤다. 등장인물의 웅얼대는 한국어 발음을 계속 놓쳐서 지아징에게 연신 방금 쟤가 뭐라고 한 거냐고 물어봐야 했다. 복잡한 획을 10초도 안 되는 시간에 읽어내는 지아징에게 어떻게 하는 거냐 물어보니 그냥 되는 거라고 한다.

    나는 가끔 지아징에게 서로 알아듣지 못해도 좋으니 모국어로 이야기하자고 말하고 싶다. 우리를 피로하고 편안하게 만드는 그 말을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마음껏 하자고.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의식하는 사람도 없이. 고쳐주거나 이해할 사람도 없이. 그냥 멋대로 말해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그러는 대신 우리는 상대방의 언어를 최대한 조심스럽게, 깨뜨리지 않고 정성스레 발음한다. 맛있는 걸 먹으면 “하오슐”. 위기에 빠진 등장인물에겐 “좆됐다.”

    수업에서 당장 그 자리에서 읽어내야 하는 지문을 받았을 때 우리가 느끼는 소외감과 불안, 두려움, 약간의 절망까지도 뒤엎어버릴 시간을 만들고 싶다. 나는 수업중에 불쑥 모국어로 모두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다. 깨진 말조각이 목에 박혀 있을 때, 내게는 외국어인 언어가 모국어인 사람이 내 깨진 말을 칭찬할 때면 더욱.

    내 정체는 시시각각 멋대로 축소되고 확장된다. 나조차 거기에 동조한다. 가끔은 그게 내 부끄러움을 감출 더 쉬운 방법 같다. 남들이 날 정의하게 두고 그 정의를 재고 없이 따라가는 일. 날 피로하고 편안하게 만드는 모국어가 그냥 되는 것처럼 내 정체가 날 피로하게 하든 편안하게 하든 그냥 되도록 내버려두는 일. 난 모국어로는 두 배쯤 똑똑한 사람. 그럼에도 여전히 멍청한 사람. 외국어 덕분에 멍청함을 감출 수 있어 다행인 사람. 1인분으로 공간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 1인분이 평균에 맞지 않는 사람. 기꺼이 따뜻한 사람. 따뜻함으로 언어 능력을 보충하는 사람. 그러다 소진되는 사람. 작은 친절에 충전되는 사람. 운전 잘하는 아시안, 외국물 먹은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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