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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기 Feb 17. 2023

뉴질랜드 크루즈, 웰링턴 & 네피어

약자의 언어를 포용하는 나라를 돌아보며


아침에 일어나 방 창문을 통해 본 항구.  또다른 크루즈가 이미 정박해 있다.  

오늘은 눈을 뜨니 크루즈가 웰링턴항에 도착해 있었다. 항구와 도심이 가까운지 크루즈에서 무료 셔틀버스를 마련해 놓았다. 주일이라 갈만한 교회를 느릿한 인터넷으로 찾으며 언덕을 오르는데 목적했던 곳에 이르기 전 뜻밖의 교회가 눈에 들어왔다. 마침 시간도 맞아떨어져 반가운 마음에 불쑥 들어갔다. 

여행 중엔 현지 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리려 한다. 런던을 여행할 땐 왕실 가족들이 참석하는 웨스트민스터 대교회에서 웅장한 예배를 드렸고 밀라노를 여행할 땐 지하 깊숙한 골방에서 아프리카 목사님을 만났는데 핀란드에서 왔다는 젊은 처자가 예배 내내 영어로 통역을 해준 적도 있었다. 파리 바스티유 근처의 어느 교회에선 영어 예배라더니 불어만 해서 어리둥절했는데 낡은 교회 천장에서 쏟아져 내리는 햇빛이 너무 아름다워 몽롱했던 영혼이 맑아지는 체험도 했다. 현지인과의 예배는 신선하고 따뜻하다. 예배를 마치고 차 한잔 마신 뒤 점심까지 먹고 가라는 친절한 초대를 사양하고 다시 여행에 나섰다.

테파파 뮤지엄. 원래는 오클랜드 뮤지엄을 갈 계획이었다. 지인인 뉴질랜드 커플의 딸이 그곳에서 일을 하기도 했고 아무래도 대도시의 박물관이 수준이 높지 않겠는가 싶어서였다. 근데 검색을 해보니 입장료가 28달러인 것이었다. 그래서 고민 없이 계획을 변경했다. 웰링턴의 테파파는 무료였고 뭐 어쩌겠나 싶었다. 

그런데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다. 현대적 건물에 첨단 미디어를 이용한 전시들도 그렇고 구성도 알찼다. 반나절 내내 몇 개 층을 돌아보면서도 지루한 줄 몰랐다.

전쟁 기념관엔 전시실 천장부터 바닥까지 가득 채운 초대형 인물상들이 전쟁의 참상을 실감 나게 전한다.

2차 대전 때 폴란드 어린이들이 시베리아 노동 캠프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떨며 학대받다 죽은 이야기, 어찌어찌 살아남은 아이들이 고아원과 병원을 전전하며 수천 마일을 걸어서 혹은 기차나 보트를 타고 유랑을 하다 지구 반대편 뉴질랜드로 와서 살게 된 이야기를 읽었다. 7백 명의 전쟁고아들이 홀로 성장하며 새 땅에서 새 삶을 일군 것이다. 

분단국가인 한국의 노인 세대들이 육이오 전쟁을 얘기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겠지만 평화로운 호주나 뉴질랜드 땅에도 혹독한 2차 대전이나 기타의 전쟁을 몸소 체험한 생존자들이 의외로 꽤 많다. 그들의 처절했던 이야기가 건국 역사의 한축을 이룬다. 전쟁은 인류가 저지를 수 있는 최악 범죄의 종합판이 아닐까. 나는 오늘도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 미스 유니버스는 아니지만.

뮤지엄 창문에서 내려다본 웰링턴의 오후가 평화롭다.

마오리족 역사 문화관도 흥미로웠다. 뉴질랜드는 국가 공식 공용 언어가 3개다. 영어 마오리어 수화.  

스위스도 영어 독어 불어를 공용하고 싱가폴도 영어 중국어 말레이어를 공용한다. 그러나 뉴질랜드의 공용어엔 남다른 포용의 철학이 있다. 다수가 아닌 약자들의 언어를 존중한다. 유럽인들이 미국이나 호주등 신대륙으로 이주해 새 국가를 건설할 때 그들은 이미 그 땅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공동체와 언어문화를 붕괴시키는 것을 당연한 절차로 여겼었다. 원주민들은 힘없이 죽었고 정체성을 잃었고 없는 듯이 사는 존재들로 남았다. 

그런데 뉴질랜드가 정부 차원에서 그 수치스러운 과거의 역사를 뒤집고 마오리족의 언어와 문화를 다시 살리겠다는 정책을 세운 것이다. 호주에서는 '잃어버린 세대' 에버리진 원주민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를 불과 10여 년 전에 간신히 했을 만큼 과거 청산 진행이 더디기만 한데 뉴질랜드는 이 부분에선 한 발 앞선 것이다. 학교 정규 과목으로 마오리 언어를 배우니 다음 세대들은 마오리 언어에 익숙해질 게다. 

게다가 장애인의 손짓언어인 수화까지 공용어로 포함시켰다니 참으로 놀랍다. 호주에서 수화(Auslan)를 하나의 외국어로 인정해서 대학 입시 과목에도 포함시킨 사실을 알았을 때 놀랐는데 뉴질랜드는 어찌 이리도 파격적일 수 있는지.


뉴질랜드의 동식물을 볼 수 있는 자연과학관도 그들만의 이야기가 끝도 없이 가득했다. 테파파를 샅샅이 둘러본 뒤 이제 남은 도시에서 더 이상의 박물관은 갈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날씨는 청명했고 유명한 도심 케이블카를 찾아 나섰다.

도시 한복판 작은 골목길 안에서 이런 케이블카가 불쑥 나타나 정말 숨겨진 보물을 찾은 듯 놀랐다. 입장을 기다리며 아들은 입구의 작은 가게에서 친구들 주겠다며 마오리 펜던트를 10개나 골라 기념품 쇼핑을 하고 나도 괜히 기분이 들떴다. 길지 않은 노선이었지만 가파른 언덕을 오르고 터널도 지나고 마주 내려오는 다른 케이블카와 손 흔들며 인사도 했다. 정상엔 트램의 역사를 보여주는 작은 박물관이 있어 잠깐 들러보기에 좋다.

그 꼭대기서 내려본 아름다운 항구의 모습. 우리가 타고 온 크루즈도 눈에 들어왔다. 벌집 모양의 국회의사당은 갈 생각이 없었는데 길을 잘못들어 먼길을 돌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꼭대기 전망대는 보타닉 가든과 연결이 되어있어 꽃길을 감상하며 걸어 내려왔다. 걷고 걷고 걸으며 사춘기 아들과 웃다가 얘기하다 싸우다를 반복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다음날 도착한 내피어(Napier)는 작고 조용한 바닷가 마을이었다. 수족관이 유명하다 해서 갔는데 너무 아담해서 좀 당황스러웠다. 디저트만 생략한 게 아니라 메인까지 건너뛴, 애피타이저만 먹고 끝낸 맛있지만 허무한 식사 같았다.

아트데코 건물들이 유명하단다. 근데 왜 사진이 한 장도 없을까. 그냥 '예쁘네' 보면서 지나갔나 보다. 남반구의 니스라는 별명이 있다는데 바닷가 풍경이 살짝 그렇기도 하고 모래 대신 자갈이 깔린 해변가도 그렇다. 이렇게 한가로이 거닐던 바닷가길이 얼마 뒤 태풍에 휩쓸리며 뉴스에 등장하니 마음이 좋지 않다.

이날은 다른 날 보다 좀 일찍 귀가했다. 딱히 더 할 것도 없고 누적된 피로를 풀을 때 이기도 했다.

그런 마음을 알았서였을까? 마을 주민들이 배를 타러 가는 길목에 서서 클래식카 전시도 하고 재즈 공연도 했다. 사람들은 사진도 찍고 춤도 추었다. 크루즈 측과 협의가 된 것이기도 하겠지만 조촐하면서도 시골 마을의 정감이 느껴졌다.

덕분에 눈도 귀도 입도 호강하는 크루즈다.

오늘의 애피타이저는 구운 가지말이와 멜론 프로슈토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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