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부담감을 짊어지고 여자는 불안감을 키워간다.
꿈같은 신혼 시절, 어느 날 퇴근하니 이혼 서류를 펼쳐 놓고 있는 아내. 동상이몽에서 오월동주로. 우리는 어디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한 걸까. 분명 함께 하는 시간이 부족했다는 걸 인정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가정의 경제를 위한 것이었는데, 이혼까지?
이런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결혼 직후 남편이 밖에서 일을 하고 아내는 가사를 전담하는 구조를 지닌 부부들은 한 번쯤 겪을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경기도 일산에 살고 있다. 이 동네 사는 사람들이 서울로 출퇴근을 하려면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적어도 3~4시간이다. 근무시간 8시간에 길에서 보내는 시간까지 하면 매일 살인적인 스케줄이다. 맞벌이라면 먼저 퇴근하는 사람이 식사 준비나 가사, 아이 픽업 등을 시작할 수밖에 없고, 가사를 전담하는 쪽은 그냥 하루 종일 독박이다. 그럴 때는 역세권, 숲세권 다 필요 없다. 할세권이 최고다. 애 보기 싫을 때는 엄마가 보고 싶은 법이다.
남자는 결혼하자마자 '부담감'이라는 반갑지 않은 손님을 짊어진다. 내가 한 집안의 가장(꼭 그만 어른인 것은 아닌데도)이라는 책임감이 기본 장착된다. '남자는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동서고금의 진리처럼 학습된 부담감은 옵션이다. 거기에 30대 직장인들은 위로 아래로 치이며 책임을 져야 한다. 군대로 치면 일병에서 상병 계급쯤, 마치 일개미처럼 일하며 신입사원들까지 책임져야 하는 위치다. 여차하면 상사의 실책까지 뒤집어써야 한다. 당연히 근무 시간이 늘어나고, 머리에는 일 생각으로 가득하다. 꼭 그(그녀)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구조적인 문제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로 인해 많은 시간을 집에서 홀로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는 초보 주부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담감을 짊어진 그는 돌아와서도 입을 닫는다. 남자가 하루에 쓰는 단어는 보통 일만 단어 이하라고 한다. 밖에서 할 말을 다 해버린 그는 기가 빠져서 '대답 없는 너'가 된다. 여자는 보통 만 오천에서 이만 단어 정도를 쓴다고 한다. 조사마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남자보다는 그래도 좀 많다. 전화도 길어야 한두 시간이고 하루 종일 싱크대나 냉장고를 붙들고 떠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신혼집을 낯선 동네에다 꾸렸다면 이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여자는 마음을 나눌 사람이 필요하다. 남아도는 일만 단어쯤을 즐겁게 소진해야 그날의 마음이 풀린다. 그런데 그 대상 0순위가 피곤에 지친 '대답 없는 너'라면, 여자의 불안감 지수가 상승하기 시작한다. '내가 결혼을 잘한 걸까?' '이 사람 나를 사랑하는 것 맞나? 아니, 관심이라도 있나?'
거기에 허니문 베이비라도 생길라치면, 오 마이 갓이다. 여자는 난생처음 경험하는 신체적, 정서적 변화와 더불어 생명을 잉태한 여성의 숙명적인 방어 태세에 돌입한다. 여성의 불안감 주식은 상한가로 치솟고, 남자가 고이 키워온 부담감은 자녀 수의 증가를 따라 승법으로 번식한다. 이쯤 되면, 이혼 얘기 한번 안 나오는 게 이상한 구조가 되어 버린다. 물론 두 사람에게는 전혀 악의도 없고, 서로에 대한 사랑이 식은 것도 아니다. 그냥 그런 것이다.
행복한 가정에 대한 환상과 기대를 가지고 결혼했지만, 평범한 부부라면 어쩔 수 없이 한 번쯤은 마주치는 문제이다. 이 문제는 그 사람의 탓이 아니고 당신의 탓도 아니다. 구조적 문제이다. 우리는 여전히 한편이다. 이 정도 이해만 있어도 훨씬 쉬워진다. 그 사람 탓이 아니라고 이해가 됐다면, 지금 당장 부부 관계를 지켜주는 마법의 말을 시작하라. '오늘 별 일 없었어?' '기분이 어때?' '무슨 생각하면서 지냈어?' '내가 뭔가 기분 상하게 했어? 미안.' 입버릇처럼 툭툭 던져주기만 해도 수많은 문제가 예방되는 이 말을 매일 매 순간 던지라. 오늘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대답 없는 너'들을 응원한다. 입을 크게 열라.
집에서 좀 더 수고하는 이들이여, 그대의 눈물을 안다. '대답 없는 너'를 가끔은 말없이 안아주라. 칭찬해주라. 인정해주라. 이것이 그대와 그대의 가족을 위해 더 유익한 길임을 기억하라. 내 경우에는 불행히도 이런 걸 알려주는 사람 없이 그 시절을 보냈다. 난 이게 이런 문제인 줄 몰랐다. 그래서 탓하기만 했고,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지금 그냥 너무 꼰대 같지 않은 동네 형이나 언니가 친절하게 알려주었다면 좋았겠다 싶은 이야기를 쓰고 있다. 그때의 우리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부디 이 이야기가 도움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