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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르미 Mar 27. 2021

남편의 중간 역할, 필요한가?

박쥐 같이 살아야 하는 남편이라는 족속들을 위한 지혜

  "중간 역할 좀 잘해. 멍청한 건지 날 사랑하지 않는 건지. 진짜 모르겠어."


  시댁 어른들 앞에서 갑자기 안 하던 집안일을 열심히 하는 남편. 아내는 이해할 수 없다. 행복하게 살고 있는 좋은 남편이라는 것을 가족들에게 과시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다. 그러나 아직 한국 사회에서 아들이 부엌에 있는 것을 행복해하는 시어른들은 (혹시 계셔도) 소수에 속한다. 왜 우리 가정의 크고 작은 일들을 그 다음날 바로 시댁 식구들이 다 알고 있을까. 오늘도 적과의 동침. 적은 내부에 있구나. 안 해도 되는 중간 역할을 하고, 정작 해야 되는 중간 역할은 안 하는 남(의) 편. 도무지 이해하기가 힘들다. 악한 마음먹고 저러는 게 아니라서 더 열 받는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친가와 아내 사이의 중간 역할을 처음부터 할 줄 아는 남자'라는 생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결혼은 다중 관계 간의 결합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구조적 문제들이 필연적으로 생기기 마련이다. 아마도 요새는 '사랑만 있으면 결혼할 수 있다.'라고 나이브하게 생각하는 커플은 없겠지만, 실제로 결혼해 보면 이 구조적 문제가 생각보다 사람 미치게 만드는 이슈가 될 수도 있다.


  성경에 이런 말이 나온다. "사람은 부모를 떠나 한 몸이 되어야 한다." 즉 부모에게서 독립하기 전에는 엄밀히 말해서 두 사람은 부부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경제적, 정서적 결합은 생각보다 견고하다. 관계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부모와 자녀는 수많은 애증의 실로 엮인 관계이기에 그 실타래를 풀어내거나 잘라내고 독립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문제로 힘들어하는 커플을 만나면 일단 풀어내는 것보다 잘라내는 것을 추천한다. 풀어내는 사이에 초가삼간 다 타고 있다. 지금(부터 영원히) 내 등을 맡길 수 있는 참 아군이 누구인지 식별해야 한다. 그런데 보통은 군대를 다녀왔다는 진짜 사나이들이 피아식별에 능하지 못한 경우를 자주 본다. 곧 죽어도 '우리 엄마, 우리 아빠'라서 그렇다. 보통 '우리 엄마'가 해다 주신 반찬이 냉장고에서 썩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 가문에 대한 모욕감을 느끼는 게 남자라는 족속이다.(다 그렇지는 않지만.) 왜 해석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를 그렇게 해석하는 걸까. 원래 냉장고의 반찬은 오래되면 곰팡이가 날 수도 있고, 더 오래 두면 썩을 수도 있다. 그게 시댁에서 해다 주신 것이든, 처가에서 해다 주신 것이든, 그냥 반찬은 반찬이다. 그까짓 게 사랑하는 내 배우자의 존재 자체보다 더 중요한가?


  그런 의미에서 아직 피아식별이 가능한 단계에 있는 부부는 작전 계획을 잘 세워야 한다. 시댁이나 처가와의 관계가 부부 관계와 복잡하게 섞여서 자꾸 갈등이 생기고 심화되고 있다면 일단 잘라내고 보자.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아직 정서적으로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못했음을 진정성 있게 상대방에게 인정하는 것이 먼저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단호하게 독립하라. 연락 좀 덜 드려도 지금은 괜찮다. 섭섭하셔도 지금은 어쩔 수 없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진짜 내 편이다. '남의 편'이라서 '남편'이라는 존재들이여, 광해군의 박쥐 외교에서 피아식별의 지혜를 배우라. 피아식별 분명히 하시는 배트맨 영화라도 좀 보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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