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등학교까지는 성적이 좋았다. 나는 가끔 이런 말을 한다. 성적은 좋았는데 공부는 못했다고. 그러면 다들 무슨 소린가 한다. 하지만 사실이다. 나는 성적은 좋았지만 스스로 공부를 잘한다고 느낀 적은 없는 것 같다. 다른 말로 하면 공부의 본질이 없이 기능적으로만 공부를 잘 한 것 이다.
이런 내 모습을 나도 모르게 자각했었던 것 같다. 그때부터였을까? 내가 지적인 것, 혹은 안다는 것을 무시하기 시작한 게 말이다. 공부가 쓸모없어 보였고 사회의 지식인들이 나쁘게만 보였다. 당연히 지식을 쌓는 노력도 줄어들었다.
이런 태도는 대학교 때 선불교를 접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언어와 지식을 무시하는 듯한 선의 태도에서 위로를 찾았다. 거기에 내가 찾던 진리가 있다고 믿었다. 참 깊은 오해와 착각이었다.
이런 나의 태도는 2013년 최진석 교수님을 알게 되면서부터 조금씩 흔들렸던 것 같다. 몇 년 동안 교수님이 강의를 듣고 책을 읽으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기본학교에서 드디어 교수님의 실강을 듣게 되었다. 나라는 모난 돌이 교수님이라는 강물을 만나 알게 모르게 조금씩 둥글어져 갔다.
나는 항상 내 삶이 힘든 이유가 궁금했다. 이제는 알겠다. 내가 그렇게 만든 거였다. 내가 감각적인 태도로 삶을 대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삶을 자꾸만 떨어뜨리고 낮추려고 하는데 삶이 안 힘들 수 있겠는가?
이제 나는 큰 사람이 되어가는 중이다. 예전의 삶을 이해했고 앞으로의 삶을 지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기본학교를 통해 얻은 가장 중요한 것이 기존의 감각적이고 경험적인 태도를 버리고 지적인 태도로 옮겨간 것이다.
거칠게 말해서 감각적인 태도는 나를 더 못 살게 만들고 지적인 태도는 나를 더 잘 살도록 만든다. 그런데 왜 지적인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킬까? 나는 오랫동안 궁금했었다. 그리고 이것이 지적인 태도를 거부하게 만든 주요한 이유였다. 하지만 이제는 이해한다. 지적인 태도에도 수준이 있다.
지적인 태도를 갖게 하는 근원이 무엇인지가 관건이다. 근원이 타인의 시선에 있다면 성장의 한계는 뚜렷하다. 우리나라는 아주 지적인 태도로 고속성장을 했다. 하지만 그 근원이 타인의 시선에 있기 때문에 지금 보이지 않는 벽에 갇혀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감각적이지 않다. 아주 지적이다. 하지만 이제 그 근원을 바꿀 때다. 지적이어야 하는 이유를 밖에서 찾지 말고 바로 자기 자신에게서 얻어야 한다. 이것이 건너가고 탁월해지는 마스터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