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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효선 Mar 24. 2021

엄마의 정년퇴직, 엄마의 인생을 쓰기로 했다.

봄의 열매, 여름의 사랑 (1)

"이런 종이접기는 처음 봐. 너희 엄마 진짜 멋진 예술가셨구나."
켄 리우 <종이 동물원>






엄마의 이름은 춘실. 오래도록 엄마의 이름이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이모와 엄마의 이름은 한 글자도 같지 않다. 왜 하필 우리 엄마만 이런 이름일까. 비슷한 이름을 지닌 사람들이 TV에서 놀림감이라도 될 참이면 괜히 우리 엄마가 놀림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화끈거렸다. 친구들에게도 우리 엄마 이름을 말해줬던 기억이 거의 없다. '택배 받을 때 유용한 촌스럽고 짱 센 이름' 같은 게 화제에 오를 때면 나는 대체로 그런 화제를 피했다.


처음 엄마 얘기를 글로 쓰겠다고 말했을 때 엄마는 두 가지를 물었다.


“내 얘기도 책이 돼?”

“내 이름도 꼭 밝혀야 돼?”


엄마가 나를 부르는 별명 엄마 껌딱지, 매미, 박하지(민꽃게를 일부 지방에서 부르는 이름이라고 한다). 엄마한테 돌게처럼 달라붙어 놀 때면 개명 얘기로 자주 장난을 쳤다.


"엄마 이름 바꾸면 안 돼? 요즘 개명 쉽게 잘해주는데. 엄마 오ㅇㅇ는 어때?"

"그건 우리 사촌언니 이름이야."

"그럼 오ㅇㅇ는 어때?"

"아이 싫어."

"왜 싫어. 훨씬 세련되고 좋은데."


계속 말해도 엄마는 개명이 별로 하고 싶지 않다고 했고, 대체로 엄마가 그렇듯 왜 싫은지 이유를 오래도록 말하지 않았다. 엄마의 속 얘기는 늘 조금 기다려야 들을 수 있다.


“내 생일이 1월 11일이잖아. 기다리던 봄의 열매라고 해서 너희 할아버지가 지어줬지. 춘실이라고.”


할아버지는 엄마가 열 살일 때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엄마와 이모는 워낙 어려서 혹시라도 놀랄까 아는 집에 잠시 보내 두었던 터라 엄마는 할아버지의 임종도 보지 못했다. 벗어진 이마 말고는 할아버지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면서도 엄마는 할아버지를 그리워한다.




당진에 있던 할아버지 묘를 3년 전 정리했다. (엄마는 5월 25일이라고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처음에는 속상하니까 이 얘기는 글에 쓰지 말라고 했다.) 엄마 세대가 모두 세상을 떠난 후면 매해 우리 세대가 묘를 관리할 수 없으니, 애들에게 부담을 지워주지 말자는 게 어른들의 이유였다.


그 해 겨울 엄마는 내내 앓았다. 아빠와 다투기라도 하면 나 속상한데 너네 아빠가 몰라주잖아, 하고 서운해했다. 늘 그렇듯 엄마는 맘고생을 하면 속병이 났고, 병이 난 후에도 속상한 이유에 대해 잘 말해주지 않았고,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야 겨우 엄마 속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엄마는 묘를 정리한 이후, 이제 다시는 할아버지 묘를 찾아갈 수도 없다는 게 서럽고 외로웠던 것이었다. 잠꼬대를 많이 하는 귀엽고 순한 우리 엄마. 엄마는 그 해 겨울 유독 자주 웅얼대며 잤다. 아버지, 때론 그런 말을 하는 듯도 했다. 엄마의 잠꼬대를 들을 때면 마음이 아팠다.


실향민이었던 할아버지. 고향에 두 명의 아들을 두고 이곳으로 왔다. 남한에서 나이가 꽤 들어 만난 우리 할머니와 결혼한 후 오래도록 자식이 생기지 않았다. 두 분 다 더는 어린 나이가 아니라 조급하진 않았을까. 그런 할아버지가 기다렸을 봄의 열매. 귀하고 사랑스러운 딸이었을 어린 엄마를 상상해본다. 엄마의 이름은 춘실. 이제 내겐 엄마의 이름이 조금 다르게 읽힌다.




가사 노동을 제외한 엄마의 공식적인 첫 유급노동은 염전일이었다. 엄마는 초등학교만 졸업했고, 중학교는 가지 않았다. 엄마의 기억에 염전일은 열네 살 때 했다고 한다.


“왜 엄마만 중학교 안 갔어?”

“공부엔 취미도 없구... 그냥 공부가 싫었어.”


가정 형편이라든지 다른 이유를 대지 않고 공부가 하기 싫어 학교에 가지 않았다는 귀엽고 솔직한 우리 엄마. 하지만 나는 자꾸만 그런 엄마가, 학교에 가지 않고 대신 일을 하던, 지금의 나보다 스무 살도 더 어린 엄마가 안쓰러워진다. 엄마가 살던 당진에서 바다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당진 염전’을 검색하면 찾을 수 있는 사진들. 장화를 신고 모자를 쓰고 염판을 나무 밀대로 미는 모습. 소금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어린 엄마도 이랬을까 상상해보곤 한다. 엄마는 열흘 정도 염전에서 일했고, 급여를 받아 이모 책가방을 사줬다고 한다.




엄마는 얼마 전 은퇴했다. 엄마가 은퇴 전 마지막으로 맡은 업무는 고등학교 청소였다. 엄마는 같은 학교에서 13년 8개월을 근무했고, 정년퇴직 마지막 두 달을 남기고 사고로 허리골절을 당해 본의 아니게 조금 빠르게 노동 바깥의 사람이 되었다. 엄마는 마지막 두 달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게 영 아쉬운 눈치다. 잘 챙겨주신 분들이 많은데 코로나에 사고가 겹쳐 제대로 인사하지 못해 마음에 걸린다는 말을 자주 했다. 은퇴하는 엄마를 위해 B 고등학교에서 마련해주신 감사패에는 환경미화 오춘실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나는 감사패와 같은 의미로 이 글을 쓴다. 열네 살부터 예순두 살까지 이어진 엄마의 노동.

엄마는 기록되어야 한다.


나는 서울대학교를 나왔다. 졸업할 땐 학교 정문에 현수막이 붙었다. 아마 적어도 입학 전보다는 유명해진 상태로 졸업했을 것이다. 엄마는 B고에서 일하기 전, 내가 졸업한 A고에서 몇 년 동안 청소일을 했다. 대학생이던 내게 엄마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직장에 다니는지 정확히 말해주지 않았다. 대학생활은 너무 바쁘고 너무 즐거웠고, 나는 엄마 바깥의 세상에서 맘껏 자유와 행복을 누렸다.


하필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에서 엄마가 청소일을 하고 있다는 걸 내가 알게 된 건 엄마가 A고에 취업한 후 두어 해가 지나서다. 엄마는 그 전에도 청소일을 했다. 사우나 청소를 할 때는 2교대로 야간 근무를 해야 했다. 예전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조건이 나은 직장을 구하고서도 내게 그곳이 A고라고 말하지 못하고 얼버무리던 엄마. 엄마가 어떤 생각으로 그랬는지는 묻지 못했지만, 부끄러워야 할 건 우리가 아니다.




엄마가 첫 입에 털어놓지 않는 엄마의 얘기가 알고 싶었다. 이 글을 쓰기로 결심한 후 나는 '취재' 명목으로 엄마와 많은 이야기를 했다. 필요할 때면 재차 물었고, 엄마가 말을 돌리면 펜싱을 하듯 살짝 돌아 다시 궁금한 곳을 찔렀다. 아이폰 메모장에, 메일함에 엄마가 한 얘기를 급하게 메모해 놓았다. 내겐 엄마의 이야기가 절실했다.


몇 주 전 금요일 저녁, 광어회와 오리고기를 차려놓고 엄마와 술을 마시던 중 고3 때 내 담임선생님이던 I선생님 이야기가 나왔다. 내가 졸업한 후에도 I선생님은 A고에 근무하셨다. 학교 청소를 하는 엄마와 마주칠 때면 주변에 있는 아이들에게 “너희들 이 분이 누구신지 알아?”하고 씩 웃고 지나가시곤 했다고 엄마는 말했다. 엄마와 나는 그 밤, 십 년도 넘게 서로 말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말했고 나는 엄청 많이 울었다. 완전히 취한 내가 요즘 피부가 조금 거칠해졌다는 엄마에게 에스티로더 갈색병을 발라주겠다고 따라 나와 시시덕댔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거실 테이블에 나와 있는 갈색병을 보고 당황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I선생님 결혼식에 부조를 못한 게 맘에 걸려.”


우리는 꽤 오래 가난했다. 대학생이던 나 역시 과외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용돈을 하고 등록금을 냈다. 당시의 엄마에겐 부조를 할 경제적인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가난은 때론 사람을 염치없게 만든다. 엄마가 얼마나 오래 마음에 걸려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안 좋았다. 토요일 아침 일찍 잠에서 깨 가장 먼저 한 일은 오래 연락드리지 못한 I선생님께 카톡을 보내보는 것이었다. 기분이 좋았다. 요 몇 년 간 그 아침처럼 정신이 맑은 아침이 없었다.




I선생님은 불초한 제자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리고 대화 끝에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그리고 효선아. 나는 너희 어머님을 너보다 대단한 분이라고 기억하고 있단다. ^^”


엄마에게 I선생님의 메시지를 읽어주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나는 I선생님께 이런 답장을 보냈다. “저희 엄마 멋진 사람인 거 같이 기억해주셔서 감사해요.” 엄마는 그 후 가끔 되묻곤 한다. 


"내가 I선생님 말대로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엄마의 그 얼굴에서 나는 내가 좋아하던 소설 속 주인공의 위대함을 본다. 하루하루의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성실하게 완수한 끝에 마침내 저도 모르게 만들어진 '시인'의 얼굴 같은. (하진의 소설 <자유로운 삶> 속 주인공의 지난한 고통과 강한 의지는 나의 부모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나는 우리 엄마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




퇴원 후 엄마가 당분간 우리 집에 와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요즘 엄마는 원래 살던 안산 집과 내 서울 집을 오가며 지내고 있다. 허리 골절로 수술을 한 후 엄마는 자주 허리가 땅기고 아프다고 말했고, 일종의 재활을 겸해 함께 수영장에 가서 운동을 하기로 했다. 수술 전에도 몇 번 함께 수영장에 간 적은 있지만 겁이 많은 엄마는 걷는 것 이상은 해내지 못했다. 어릴 때 물에 빠질 뻔해서 고개를 물에 담그는 게 무섭다고 했다. 엄마는 낯선 사람들이 많은 압박적인 환경도 부담스러워하는 편이라 초급반 수업에 들여보내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최소한 물에 뜰 수 있을 때까지, 간단한 발차기를 해낼 수 있을 때까지는 내가 엄마에게 수영을 가르치기로 했다.


은퇴 후 시간이 많아진 엄마와 퇴근 후, 주말마다 자주 수영장에 갔다. “이거 봐. 뜬다, 뜬다, 뾰오옹” 하면 겁먹은 눈으로 조심스럽게 물에 떠서 발차기를 시작하는 엄마. 나는 그런 엄마가 사랑스럽다.


나는 오 년째 수영을 하고 있다. 엄마와 처음 수영장에 함께 몸을 담가본 건 삼 년 전 하노이에서였다. 그날 호텔 야외 수영장엔 엄마와 나 밖에 없었다. BTS의 노래가 흐르는 수영장에서 서로 손을 붙잡고 물속에서 점프를 했다. 엄마는 목욕을 좋아한다. 그런 엄마가 수영을 좋아할 거라고 왜 생각해내지 못했을까. 배럴 재킷을 입고 선베드에 앉아 브이를 하는 선글라스를 쓴 엄마.


두브로브니크에서 아드리아해의 새카만 바다에 몸을 던지며, 여행 가이드북에서 설명한 ‘사이다 같은 물’이 온몸에 닿아오던 순간 나는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던 모든 행운에 감사했다. 여름을 좋아하게 된 건 수영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엄마와도 그러한 기쁨을, 여름에 대한 사랑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엄마가 수영을 해낼 수 있길 바란다. 엄마의 노동과 나의 노동, 혹은 엄마의 수영과 나의 수영. 이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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