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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효선 Apr 19. 2021

엄마는 복사꽃 이파리가 좋아 신행길이 좋았다

봄의 열매, 여름의 사랑 (4)

엄마는 공중에 휘날리는 복사꽃 이파리가 좋아 그 순간 생에 감사했다. 천지가 이토록 고우니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김서령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






엄마에 관해서라면 많은 걸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엄마와 대화할수록 내가 아는 건 일부에 불과함을 깨닫게 된다. 엄마가 꽃을 좋아한다는 것도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다. 어버이날 선물한 장미 꽃다발 하나에 엄마는 와르르 웃었다. 3월 8일은 국제 여성의 날. 병원에 다녀오는 길에 엄마에게 시청 앞에서 산 만 원짜리 장미꽃 한 다발을 선물했다. 집에서 내가 올 때까지 땅콩을 까먹고 있던 엄마는 장미꽃 세 송이에 무척 행복해했다. 소중하게 꽃을 쥐고 웃고 있는 엄마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오늘은 여성의 날이니까 엄마 날이야.”


엄마는 귀한 사람이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엄마 자신이 알길 바란다.




이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내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말했다.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 같다고 여러 사람이 격려해주었다. 수면제를 받기 위해 작년부터 다니던 병원 선생님께도 말씀을 드렸다.


“그 과정이 효선 씨에게 도움이 되겠네요.”


나는 내 삶에 대한 모든 결정을 내가 한다. 그에 대한 책임도 당연히 내가 진다. 때론 부모님에 관한 결정도 내가 한다. 그에 대한 책임도 역시 내가 진다. 나 자신에게 자꾸만 가혹해지는 내 안의 경직성. 내가 왜 잠을 못 이루면서도 이러한 내 삶의 방식을 포기할 수가 없는 건지, 수면제를 받기 위해 찾은 병원에서 처음 이야기를 시작했을 땐 나를 이해하기 어려워하시던 병원 선생님도 어린 시절에 대한 어떤 이야기를 듣고선 효선 씨가 조금 더 이해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수영장의 엄마. 킥판을 안고 뒤뚱뒤뚱 발차기를 하는 엄마는 내가 어깨를 잡아 방향을 교정해주지 않으면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만다. 이 글은 엄마의 발차기처럼 어디로 갈지 아직 알 수가 없다. 다만 한 가지는 의심하지 않고 있다. 엄마에 대한 나의 필연적인 사랑이 내 삶을 앞으로도 환한 곳으로 이끌 거라는 점.




엄마는 신당동에서 태어났다. 수로 설비를 하던 기술자인 할아버지의 일을 따라 여러 번 이사를 했다. 


"전주에서도 살았었고, 인천에서도 살았었고, 당진에서도 살았지?"


엄마는 이사한 집들을 어렴풋이 기억해냈다. 송악과 성문과 고대. 당진에서도 여러 번 집을 옮겼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모는 도시로 학교를 갔고, 엄마는 할머니와 남아 집안일을 도왔다. 토끼와 닭과 강아지를 먹이던 엄마. 작두질을 하다 손가락이 잘릴 뻔한 엄마.


“쥐 XX 때까지 자고 있냐!”


할머니는 서북 사람이었고, 목소리가 크고 괄괄했다. 1.4 후퇴 때 거제도 수용소로 내려와 살아남은 할머니의 생존력. 나는 연한 갈색인 엄마의 눈동자를, 그 순하고 맑은 눈을 가끔 빤히 본다. 토끼 눈을 뜨는 마음이 여린 엄마로선 할머니의 감정 변화를 모두 따라가긴 어려웠을 것이다. (이모는 얼마 전 할머니를 '그릇 같았다'라고 회상했다. 늘 그 그릇의 감정이 넘치곤 해서, 제발 오늘은 안 그랬으면 하는 날도 여지없이 넘치고 말았다고.) 아침까지 엄마가 자고 있으면 밥하라고 할머니는 소리를 질렀다. 할머니는 자주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밥을 하라고, 소를 먹이라고. 학교를 가지 않고 집에서 할머니 일을 돕던 엄마는 날것인 할머니가 그대로 쏟아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런 욕을 한다고?”

“그랬다니까.”

“와 할머니 나한텐 그런 거 전혀 없었는데.”


나는 막내에 어릴 때부터 똑똑해 할머니에게 귀여움을 받았다. 권사님이던 할머니의 목소리. “효선이 오나.” 그 다정한 음성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엄마한테는 유독 모질게 굴었을 할머니가 처음엔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엄마는 할머니에게 순종적인 딸이었다. 할머니가 같이 살자는 곳에서 같이 살았고, 월급봉투를 할머니에게 드렸고, 할머니가 시집가라는 시기에 맞추어 시집을 갔다.


“서울은 언제 올라왔어?”

“열여덟, 열아홉이었나... 주민등록증 나오고 왔지.”


엄마는 마지막으로 밭에 콩을 심어놓고 상경했다. 상경 후 짧게 인형공장에서 시다바리 일을 하기도 했다. 인형 공장엔 열다섯 명의 미싱사가 있었고, 두 명의 '시다'가 미싱사의 책상을 오가며 옷감을 날랐다. 그리고 첫 입사. 여기서부터는 나도 들은 적이 있어 대충 아는 얘기였다. 곱창이며 삼겹살을 안주 삼아 술고래인 내가 신이 나서 소주를 시키면 엄마는 가끔 소주공장 얘기를 시작하곤 했다.




열여덟, 열아홉 쯤. 고향에서 집안일을 하고 있던 (다시 말하면 어른들이 보기엔 놀고 있던) 엄마는 조카를 봐주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아이를 돌보는 일을 했다. 얼마 후 할머니도 서울로 올라와 흑석동에서 할머니와 살림을 합치게 된다. 그리고 엄마는 정식으로는 첫 취업을 하게 된다. J 소주였다. 흑석동에서 J 소주 공장이 있는 신길까지는 거리가 꽤 멀었다. 엄마는 새벽 다섯 시면 일어나 준비를 했다고 한다. 지각도 결근도 없이 늘 그 자리에 있던 여공 한 명. 그 사람이 우리 엄마다.


“방직 공장은 키가 작아서 안 가는 게 좋다고 하데. 기계에 딸려 들어간다고.”


엄마는 무시무시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그런 사고가 누구에게나 벌어졌을 시대였다. 외숙모는 공장에서 퇴근하는 여공들에게 취업할 만한 일자리가 있는지 물어봤다. 채용을 시작하면 동네에 플래카드를 붙인다는 답을 듣고 채용을 기다렸다.


“고모 J 공장이나 들어가 봐. 시골 돌아가면 일만 하잖아.”


외숙모는 다른 일을 하지 않던 엄마를 J 소주에 입사시켰다. 입사 후 기숙사 생활을 하다 얼마 후엔 다시 기숙사를 나와 할머니와 집을 얻어 살았다. 여공인 엄마는 ‘미스 오’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기숙사로 복귀하는 엄마를 공장 정문 앞까지 따라온 남자를 두고 ‘미스 오 애인 왔나 봐.’ 하는 말에 질겁을 해 도망친 적도 있다고 했다. 식품을 다루는 업무라 육 개월에 한 번씩은 건강검진을 해야 했다. 건강검진 서류에는 자기 이름을 한자로 써야 했는데, 엄마는 한자로 이름을 쓰기 어려워 (春實은 실제로 획이 많고 어려운 한자 이기도하다.) 친구들이 대신 써줬다고 했다.


여공들은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면 초록색 소주병 중 불량을 고르는 일을 했다. 남자들은 상자를 나르고 컨베이어에 소주를 올려주는 등의 힘쓰는 일을 했다. 2교대로 일하기도 했고 3교대로 일하기도 했다. 엄마가 그만둘 무렵엔 아침 근무만 했었다고 한다. 내가 자주 마시는 375ml 소주 한 병이 돌아가는 라인은 '이홉들이'라고 불렀다. 엄마는 '사홉들이'(720ml) 라인에서 일했다. 이홉들이 라인은 병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와  여간 손이 빠른 사람이 아니고선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엄마는 겨울을 '지랄 맞은' 계절로 기억했다. 소주가 든 겨울 유리병은 아주 차가웠다. 공장에서 자주 소주병이 깨졌다. 알코올 냄새가 나는 공장에서 여공인 엄마는 일했다. 엄마는 소주 한 잔도 마시지 못한다.



가장 힘들었던 일은 2교대를 하며 잠을 쫓는 일이었다고 한다. 잠 안 오는 약을 먹고 근무하는 동료들도 있었다고 했다. 기숙사 생활을 할 땐 별난 룸메이트를 만나 주전자에서 끓고 있는 물에 팔을 덴 적이 있다고 했다. 산재처리를 해 치료했다는 그 상처 자리는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엄마는 그 직원의 이름까지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글을 위해 자주 검색을 했다. 신길동 J 소주와 숙모가 다녔다던 방직 공장 터의 사진을 엄마는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노조 같은 건 안 했어?”

“그런 건 남자들이 했지. 여자들은 안 끼워줬어. 하기도 싫었어.”


부모님과 일 얘기를 하면서 나는 자주 노동법에 대해 말했다. 계약서를 왜 안 써. 그건 노동법에 없는 건데? 노동청 가면 되는 건데? 엄마, 아빠는 당연히 내 말을 듣지 않는다. 1960년대와 1980년대, 혹은 1980년대와 2010년대. 우리의 노동 사이엔 꼭 그만큼의 거리가 있다.




공장이 이천으로 이전할 예정이어서 이미 사람을 줄이고 있는 중이었다. 엄마도 이천 공장으로 따라갈까 고민하던 중, 선을 봐 아빠를 만났다. 손아래인 이모가 곧 결혼할 예정이라 외가에서는 엄마의 결혼을 서둘렀다. 엄마에겐 네 번 선이 들어왔고, 그중 두 번의 선이 실제로 이루어졌다. 엄마가 첫 번째로 만나본 남자는 키가 크고 농사를 짓는 남자였다고 한다. 집안은 여유로웠고, 그쪽에서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시댁이 까다롭다는 말에 그쪽엔 마음이 가지 않았다. 우리는 자주 그 선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엄마 그 사람하고 결혼했으면 고생 많이 안 했겠다. 그래도 그쪽으로 갔으면 우리 딸 안 태어났을 거야. 엄마가 그렇게 말하면 나는 항상 대답했다. 나 안 태어나도 되는데, 여유 있는 집 가서 편하게 살지. 엄마는 그럼 대답한다.


"우리 딸 없이 내가 어찌 살 거나."




엄마가 두 번째로 만난 남자가 지금의 내 아빠였다.


둘은 광명시 돌체다방에서 두 번째로 만나기로 했다. 엄마가 당진에서 살 때 엄마를 눈여겨본 이웃 사람이 우리 고모였다. “네 결혼은 내가 이어줄게.” 고모는 아빠에게 장담했다. 둘은 1월에 처음 만났다. '쇠를 깎는' 공장 노동자인 아빠는 모처럼 양복을 차려입고 다방에서 엄마를 기다렸다. 한 시간이 지나도 엄마는 오지 않았다.


‘딱 두 시간만 기다리다 가야지.’


아빠의 기다림을 생각한다. 나는 나 자신의 기원을 가끔 스스로 묻곤 했다. 내 생각은 종종 그 다방을 향해 닿는다. 성냥개비를 꺼내 탑을 쌓으며 하염없이 기다리던, 휴대폰도 무엇도 없어 연락도 해볼 수 없는 아빠. 다방 난로 위에 놓인 주전자에선 엽차가 끓고 있다. 아빠는 전국 노래자랑이 끝나면 일어서자고 다짐한다. 그리고 한참 늦게야 도착한 엄마. (엄마는 왜 늦었는지 이유가 잘 기억나진 않는다고 했다. 아빠는 한겨울이라 길이 얼어있었다고 기억했다.) 엄마가 끝내 도착하지 않은 그 다방의 풍경을 나는 가끔 상상해보곤 했다. 마지막 성냥개비를 테이블 위에 던지고 열없이 일어나 휘적휘적 걸어 나갈 덥수룩한 머리를 한 아빠의 뒷모습.


“아빠 어디가 좋았어?”

“냄새가 안 나서 좋았지.”


비쩍 마르고 키가 작은 아빠. 당시 아빠는 담배도 피우지 않았고, 술도 마실 줄 몰랐다. 엄마는 인정하지 않지만 엄마는 아빠의 어떤 면에 호감을 느꼈을 것이다. "왜 결혼했어?" 반복해서 물으면 엄마는 남 일 말하듯 대답한다. "좋으니까 했겠지."


TV에서 개그맨들이 옛날식 성냥갑으로 탑을 쌓는 장면이 나왔다. 아빠는 그 성냥탑을 보고 '돌체다방 성냥탑'에 대해 얼마 전 다시 이야기했다.


"탑이 무너지면 사랑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해서 되게 조심조심 쌓았어."

"그때도 엄마랑 결혼하고 싶었어?"

"그랬지. 엄마 지금도 예쁘지만 그때 엄마 천사 같았지. 겨울이라 양 볼이 발갛게 되어서. 처음 봤을 때부터 예뻤지."



 

아빠는 숫기가 없어 말이 없고 무뚝뚝했지만, 세심하게 엄마를 챙길 줄 알았다. 이십 대인 두 공장 노동자, 월급봉투를 모두 엄마와 누나에게 가져다주며 살았던 엄마와 아빠는 자신이 가진 옷 중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광명과 안양과 서울을 오가며 데이트를 했다. 돈은 없었지만 차마 엄마에게 영화표를 사달라는 말을 할 수는 없어 거리를 떠돌았다던 둘의 데이트. 둘이 오갔을 눈 쌓인 거리를 나는 꼭 본 것만 같다. 처음부터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이었다. 둘 사이엔 자연스럽게 결혼 얘기가 오갔다. 엄마는 1984년 5월 1일자로 사표를 냈고, 6월 3일 자로 결혼했다. (엄마는 어떤 날짜는 아주 정확하게 기억한다.)


엄마는 지금도 누워있는 아빠를 보며 말하곤 한다. 눈도 이쁘고 코도 귀엽고 입술도 귀엽다고. 엄마 그럼 그냥 다 이쁘다는 거 아니야? 내가 되물으면 또 와르르 웃고 마는 엄마. 엄마의 그 많은 사랑은 대체 어디에서 쏟아져내리는 걸까. 엄마는 지나가는 말처럼 이야기한다.


"나도 부모사랑 못 받았고 저도 부모사랑 못 받았으니 서로 불쌍하다 하고 산 거지."


나는 더욱 궁금해진다. 사랑이 뭔지 기억이 없던 두 사람이 만나 나를 낳았다. 내 부모의, 엄마의 저 많은 사랑은 대체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인지.




둘은 아빠의 이름을 '김대수 군'으로 잘못 기억해 내내 잘못 부른 목사님을 주례로 세워 결혼식을 올렸다. 엄마보다 마른 아빠와 작고 뽀얗고 오동통한 엄마. 둘은 무궁화호를 타고 아빠가 태어난 곳인 부산으로 신혼여행을 갔다. 기차에는 대학생들이 함께 타고 있었다고 한다. 신혼부부의 얼굴을 그들이 유심히 보는 것 같았다고 엄마는 기억한다. 둘은 태종대에서 유람선을 탔고, 바닷가에서 사진을 찍어준다던 사진사한테 사기를 당했다.


"지금 생각하면 처음부터 그 카메라에 필름이 없었던 것 같아."


아빠는 요즘도 사기를 친 사람이 아닌, 사기를 당한 자신을 탓하며 그때 얘기를 한다. 돈을 지불하면 사진을 보내주겠다던 그의 말과 달리 사진은 끝내 도착하지 않았다.


부산 국제 영화제를 즐겨 찾던 시절, 태종대에 갔던 적이 있다. 계단은 바다까지 끝을 모르고 이어졌고, 좁게 난 길엔 나무 그림자가 무성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나뭇잎을 쨍하게 때리던 햇볕. 나는 그 바다를 함께 보고 있었을 가난한 부부를 종종 상상하곤 한다. 엄마는 그렇게 기혼여성이 되었다. 엄마의 노동은 이제 다음 단계로 접어든다.



















* 이번 편 제목은 김서령 작가의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에서 문장을 빌려왔습니다.

* 커버 사진은 H님께서 찍어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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